사는 게 재미없나요?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라앉는다.
알람이 울린다. 익숙한 멜로디가 귓속을 찌르듯 파고든다. 오늘은 유난히 거슬린다. 화면을 밀어 끄고 다시 눈을 감는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방.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커튼을 뚫고 벽지를 따라 흐른다. 그 빛이 내 쪽으로 오기까지는 아직 멀다. 몸을 일으키는 일이 괜히 짜증스럽다.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 곧이어 부스럭거림. 도둑고양이처럼 또 그가 왔다. 조용히 움직이는 듯한 자잘한 소리들이 더 거슬린다. 이불을 뒤집어쓴다. 약간의 답답함, 작은 동굴 같은 적요. 그 적요는 오히려 통각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다행히 동굴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시간은 느리지만 흘러간다. 멀리서 분침이 또각거린다. 기운이 없다는 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그는 이십여 분이면 쓰레기를 모아 현관 앞에 내놓고, 부엌에 널린 캔과 비닐을 정리하고, 먹을 물을 챙겨두고, 음식물쓰레기를 담아 사라진다. 사람의 인기척이 이렇게 소름 끼칠 수 있을까.
개 한 마리를 본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며 학대받아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 개. 마침내 좋은 사람을 만난다. 사람은 방석을 깔아주고, 목욕을 시키려 하지만 개는 허락하지 않는다. 끼니마다 습식 사료를 내어주었지만 개는 인내를 택했다.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이 사라지고 어둑해지면 개는 약간의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다시 무너졌다. 개는 사람이 왜 배변을 치우는지, 향기로운 담요를 덮어주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다정함이 낯설고 무서웠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데 몸이 바닥에 눌린다. 눈은 떠 있지만 깨어 있다는 실감이 없다. 꿈에서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현실이 더 흐릿하다. 해야 할 일은 있지만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누운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듯 어지럽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주방까지 가는 길에 멀미가 난다. 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걸음마다 반대쪽으로 휘청인다. 겨우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끌고 간다. 새벽에 마신 오렌지 주스 자국이 말라붙은 머그잔, 전자레인지 안의 식은 밥. 찬물 한 컵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순간, 이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다. 밥을 담으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부엌의 사물들이 투명한 그림자처럼 산만하게 오락가락한다. 한참을 그러다 베란다 창문을 연다.
세상의 소리가 솨, 하고 밀려든다.
이웃 벽 너머로 젊은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이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진다. 내 안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세상처럼 잠잠하다.
무기력은 그렇게 온다.
경고도, 설명도 없이. 조용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기운이 없어”라는 말은 속의 피로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라는 말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책임이 숨어 있다.
“잘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로는 그 순간의 나와 너무 멀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
누구도 나를 흔들지 않았으면 한다.
올리비아 랭은 “외로움은 피로로 가장해 찾아온다”고 했다. 아마 이런 상태를 두고 한 말일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친근하지 않다. 아침이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습관 탓에 텅 빈 하루는 혼란을 남긴다. 그러나 그 혼란도 오래가지 않는다. 몸이 먼저 포기한다. 의지는 침대 모서리에 걸치고, 나는 그보다 더 깊숙이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하루가 그렇게 흘러간다.
반쯤 깨어 있다 다시 잠들고, 텅 빈 천장을 바라보다 수면유도제를 삼킨다. 스피커에서 야스민 레비의 〈우나 노체 마스〉가 애절하게 흐른다. 눈을 감는다. 누군가는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나는 멈춰 있고 멈춰 있어야 한다. 억지로 나를 밖으로 내몰지 않는 하루가 나를 조금 쉬게 한다.
무기력하면, 좀 어때.
기운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충분히 애쓰고 있다. 오늘은 그저 숨만 쉬어도 되는 날. 나는 일어나지 않을 자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