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재미없나요?
어떤 사람과도 부딪힐 일, 웃을 일도 없는 날. 또 그가 왔다. 우렁각시가 아니라 우렁도둑처럼 자꾸 다녀간다. 그는 오늘도 슬그머니 들어와 먹을 것을 두고,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 나간다. 오늘은 움직임이 더 빠르다. 열렸다 닫히는 문소리와 비닐 부스럭거림이 귀에 거슬려 역하게 들린다.
일부러 문을 닫고 숨은 건 아닌데, 말 없는 시간이 내 몸을 감싸며 작은 방 안에 스며든다. 소리의 두께가 얇아지고, 공간의 흐름이 멈춘 듯 침묵이 감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엔 생각이 더 또렷하게 자란다. 입 밖으로 내면 불필요한 파문이 일어날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한다. 생각은 웅성거리지만 나는 천천히 숨만 내쉰다.
창문을 닫자 방 안은 더 고요해진다. 그제야 아주 작은 소리들이 드러난다. 냉장고의 미세한 진동, 손목시계의 또각거림,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 그 틈새에 내 숨소리가 얇게 섞인다. 방 안을 둘러보면 책상 위 노트, 창틀 위 먼지. 말라서 건조해진 공기안에 어제의 시간이 눌러앉아 있는 듯하다.
매일 같은 물건, 같은 구조, 같은 풍경. 익숙해서 편한 게 아니라 달라지지 않아서 무력하다. 아무 일도 없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더 지치는 날. 오늘 하루가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을 허무하게 만든다.
서랍에서 오래전 써두고 부치지 못한 엽서를 꺼낸다. 여행지에서 적은 한두 문장. 끝내 닿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 목적지 없이 멈춰 있는 글. 가끔은 이 엽서처럼 머물러 있는 하루도 나쁘지 않다고, 가슴이 말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뜬다. 손을 뻗지 않고 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린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숨소리를 억제한다. 오늘은 굳이 어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으면 한다.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린다. 뜨거운 물이 컵 안으로 떨어지고, 거품이 일며 향이 퍼진다. 오늘은 죽은 감각이 주인이 된 듯하다. 커피도, 바람도, 햇살도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묵묵히 흐른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는 실감은 멀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할 일은 있지만, 하지 않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인다. 오늘 필요한 건 그저 조용히 있는 일이다.
점심은 냉장고 반찬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차려 먹기보다는 비워내는 데 가까운 식사. 씹고 삼키는 동안 오늘의 시간이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해 본다. 하루 해가 저물 무렵, 식탁에 앉은 나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빨래를 넌다. 창문을 열고 축축한 천을 햇볕에 건다. 바람이 옷자락을 스친다. 섬유 사이로 미모사 세제 향이 번진다. 널린 옷 사이에서 나도 함께 마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곁에 누군가 있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위로하지 않아도, 괜찮냐고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정적 같은 사람.
햇살이 구부정한 등 뒤를 스치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 자리에 몸을 기대며 앉는다. ‘괜찮아, 이렇게 있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창밖 지붕 위를 고양이 한 마리가 걷는다. 아주 천천히 발을 들고 놓는 움직임이 내 하루를 닮아 있다. 빠르지 않지만 분명히 내일을 향해 걷고 있다. 이 하루는 특별하지 않지만 선명히 존재하는 하루다. 흥미롭진 않지만 멈춰 있지도 않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 꾸미지 않아도 되는 마음.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나의 감각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나에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