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웃을 수 있게 되더라

특별함을 주는, 평범한 문장들

by 보나쓰
누구나 한 번 사선을 넘고 나면 담대해지고, 뭔가 보람 있는 일에 몸 바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p.291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가 죽을 만큼 미워서,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손가락 하나쯤 잘라야
겨우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


내 눈동자 안에는 자비 없는 신이 깃들고,
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살아보니, 그런 날도 생기더라.


지옥이 따로 없다고 여겨졌던 그 순간들이
어느 날은 ‘그게 언제였더라’ 싶은 망각이 되고,
그렇게 아둔하다고 말하던 닭대가리보다
더 아둔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죽고 싶었던 날,
여기가 지옥이구나 싶었던 시간을 지나고 나면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계속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기를 잘했구나’ 싶은 순간이 온다.
한 번쯤은, 이 인생에 미치도록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몸 안에서 솟는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게 되고,
다 받아줄 것 같은 통 큰 언니가 되어버리는 날도 있다.
아픔을 지나온 자리에, 언젠가는 작은 용기가 자란다.

그렇게 나보다 더 아픈 생명이 눈에 들어온다.


비비탄을 맞아 왼쪽 눈에 피가 엉긴 고양이를 보고
작은 기부라도 하고 싶어지고,
정치인보다 더 정치에 몰입해
밝고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서서히, 이글거리듯 일어나기도 한다.


살아 있음이 때로는 부끄러울 만큼 작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나는
누군가를 향해 아주 천천히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더라.


천천히라도, 다시 손을 내밀 수 있고
버텨낸 시간 끝에, 다시 웃을 수 있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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