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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잘 날 없는 첸나이


첸나이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은 정말이지 바람 잘 날 없는 하루 하루였다. 11월에는 화폐 개혁을 단행한다며 뜬금없이 누런 색의 500루피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통에 500루피를 소진하느라 애를 쓰다가, ATM에서 돈을 찾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워 현금이 없어 애를 먹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공표한 날짜 이후로는 그 어디에서도 누런 색의 500루피를 받아주지 않아, 놈팽이 남편들 몰래 애들 교육비를 위해 쌈짓돈을 모아두었던 시골 할머니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다는 씁쓸한 이야기들도 들렸다.


그리고 연달아 12월에는 급작스레 심장마비로 실려간 타밀나두 주의 신격인 주지사 자얄리타의 생사 여부에 귀추가 주목되면서, 그 여부에 따라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다들 긴장 상태였다.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온 첸나이가 들썩이며 경찰들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고 이런 저런 흉흉한 소문들이 온 도시를 지배했다. 외국인들은 괜히 돌아다니다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으니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유도 출처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 속에 다행히 무탈하게 자얄리타의 사망 비보와 함께 어마어마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나서 겨우 한숨을 돌릴까 했더니, 앞서 말했던 사이클론으로 남은 12월은 초 긴장과 두려움으로 보냈고, 사이클론이 지나고 피해와 잔해들을 추스르고 처리하자마자 2017년 1월에 또 사건이 터졌다. 


1월은 첸나이가 있는 타밀나두 주에서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뽕갈(Pongal)이 있는 달인데, 뽕갈 3일째 되는 날 추수에 도움을 준 소에게 감사하며 소를 꾸미고 소와 관련된 각종 전통 놀이, 게임을 행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잘리까뚜(Jallikattu)라는 소몰이 전통인데, 맥도날드와 KFC, 펩시, Coke와 같은 미국 대기업들이 타밀나두로 대거 들어오면서 동물학대라는 이유로 잘리까뚜에 반대를 해, 2017년 뽕갈에는 잘리까뚜를 볼 수가 없었고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 잘리까뚜를 돌려달라고.


잘리까뚜가 분명 동물 학대의 일부로 비춰질 수 있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충분한 대화나 이해 없이 이들의 오랜 전통을 하루아침에 금지해버린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첸나이의 모든 숍들은 문을 닫고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앞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한시바삐 픽업해 가라는 학교의 문자를 받고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시위를 이유로 차의 통행을 금지시킨 터라, 아이들을 데리러 시위대 앞을 지나 학교 교문까지 걸어가야만 했던 그 순간의 긴장감은 글로써 차마 표현할 수가 없다. 험악한 인상으로 예의 우리를 주시하던 그 눈빛들, 불만 가득한 호통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던 그 표정, 누군가에게 쏟아 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그 공격적인 긴장감 속에서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탈출(?)한 그날은 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하던 날이었다.


미처 제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못한 이들은, 시위대로 인해 학교가 봉쇄되어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 아이들은 다행히 선생님들과 교직원의 안내 하에 학교 안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이가 곁에 없어 불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첸나이의 그 어디보다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아메리칸 스쿨 내부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장한 경비들과, 충분한 음식과 깨끗한 물, 상비약을 모두 갖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장감 속에서 며칠간의 대치가 있은 후, 다행히도 인도 주 정부에서는 타밀나두 주의 잘리까뚜 부활을 인정해 주었고, 장기간으로 대치가 이어질 거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던 우리에게 이는 정말 희소식이었다.


첸나이에서 두 번의 혹독한 겨울을 겪은 후, 겨울이 다가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부산스레 준비를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천만 다행히도 2년 연속의 악몽과 같은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첸나이에서의 바람 잘 날 없던 두 번의 겨울은, 평생 처음으로 느껴보았던 두려움과 더불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더 넓고 크게 만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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