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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봉봉 Nov 11. 2024

국제학교의 추억

알록달록 색색의 친구들이 모였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키가 제법 큰 아이. 갓 유치원을 졸업한 것 같은 작고 귀여운 아이.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아줌마들의 정신까지 쏙 빼놓는 꾸러기들도 있다. 다 같이 우르르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D국제학교다.

나이와 성별은 다르지만 캠프에 와서 영어를 배우고 다국적 문화를 경험하기 위한 목적만큼은 똑같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들의 목적이. 




우리가 선택한 D국제학교는 영국식 커리큘럼과 핀란드 교육방식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다. 기업가 정신을 중요시하며 아이들의 자기 주도적 태도를 강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수업시간에도 간식을 먹을 수 있어서 아이들이 더욱 좋아했다. 



학교 매점에서는 핫도그, 조각 과일, 과자 같은 다양한 간식을 팔았는데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간식은 곤약젤리였다. 고체와 액체의 중간 형태로 말캉한 식감이 특징인데 파우치에 담겨 있어 쪽쪽 빨아먹는 재미까지 있다. 포장지에는 히잡을 두른 여인과 한글로 “곤약젤리”라는 큰 글씨가 대비되며 무릇 어색하게 보였다.

쉬는 시간마다 곤약젤리를 찾는 참새들로 매점 줄은 항상 길었다. 뒤늦게 곤약젤리 대열에 합류한 딸내미 셔니도 참새가 되어 50센트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수업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먹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는 그때. 옆에서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같은 반 유일한 한국인 친구인 영우였다. 영우는 또래에 비해 다부진 체격에 흰 피부로 늘 해사하게 웃었다. 셔니에게 곧잘 장난을 쳐서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장난꾸러기이기도 하다.

“곤약젤리 사려는 거지? 

내가 1개 줄 테니까 나한테 살래? 

여기서 내가 오래 줄을 섰으니까 1링깃만 줘.”


곤약젤리 가격은 50센트. 수고비를 쳐서 두 배 값을 주면 곤약젤리를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셔니는 50센트짜리 곤약젤리를 1링깃을 주고 사 먹었다. 상대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흥정할 줄 아는 영우는 기업가 마인드를 강조하는 D국제학교의 교육철학을 벌써 체화했나 보다.




3학년 승준이는 영유 출신으로 영어를 매우 잘했다. 첫날부터 학교 선생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엄마들은 넋을 놓고 부러워했다. 승준이의 프리토킹 수준과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는 캠프 아이들 중에서도 낭중지추 같았고 그렇게 첫날부터 엄마들의 슈퍼스타가 됐다. 다들 승준이 엄마에게 다가가 영어 히스토리를 물어보기 바빴다. 승준이 엄마는 그때마다 겸손하게 웃으며 약간의 정보를 흘렸고, 자랑인 듯 자랑이 아닌 것 같은 화법으로 승준이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승준이처럼 의사소통도 원만하고 적응이 빠르면 좋으련만, 아이들의 성향과 영어 수준에 따라 적응 기간은 천차만별이었다. 캠프에 온 아이들 중 은채가 그랬다. 가장 나이가 어린 1학년 은채는 노란색 유니폼을 입을 때마다 깜찍한 병아리 같았다. 아침마다 병아리의 눈에는 이슬이 촉촉했다. 은채와 데칼코마니 같은 은채 엄마도 표정이 밝지가 않다. 핑크색 원마일웨어 상의에는 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은채의 눈물 자국이다. 어제도 아이를 등교시킨 후 가디언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학교까지 다녀왔단다. 



은채는 학교만 가면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여기저기가 아파 선생님과 엄마를 긴장시켰다. 어느 날은 교실 이동 수업 중 같은 반 친구를 놓쳐 복도에서 울고 있었는데 캠프에 함께 간 고학년 언니들이 은채를 발견하고 달래주기도 했다. 수업이 끝난 후 하교할 때의 은채는 환하게 웃고 있어서 아침에 울었던 아이가 맞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국제학교에서는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 교과 수업 이외에도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발성을 배우는 드라마 수업, 한 가지 주제를 정해 팀별로 프로젝트 수업을 하는 IPC, 플랭크, 스쾃, 팔 굽혀 펴기 등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PE수업 같은 체험 위주의 수업이 많았다. 


평소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편인 셔니는 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가끔은 학교에 가기 싫어할 때도 있었고, 종일 수영장에서 놀기만 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여기까지 들인 시간과 경비 생각에 아이를 어르고 달래 꼬박꼬박 학교를 보냈는데 버디 친구 야스민과 새로 사귄 신띠아 덕분에 그나마 재미를 붙이고 다닐 수 있었다. 

버디는 외국인 학생을 도와주는 도우미 같은 친구다. 과목이 다양한 만큼 이동 수업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챙겨주고, 어리바리 헤맬 때 도움을 주고 청할 수 있는 마니또 같은 존재였다. 


야스민은 약간 작은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동글한 얼굴이 총명해 보였다. 말레이시아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까지 잘하는 다재다능한 친구다. 한국 학교에도 스쿨링 캠프가 있냐며, 꼭 와보고 싶어 했다. 귀국해서도 그때의 우정을 기억하고 이따금 왓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나누고 있다. 



어느덧 3주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수료식날이 되었다. 그새 정이 든 아이들은 버디 친구들과 울먹거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가 학교를 나와 버스를 탈 때까지도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환송해 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잠시 머물다가는 이방인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차별 없이 대해주는 아이들이 정말 고마웠다.


우리가 배운 건 영어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언어였다. 환대하며 함께 나누는 진심. 비록 짧은 만남이지만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이 되었기를. 

말레이시아에는 야스민이 있고 한국에는 셔니라는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서로 오래도록 기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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