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분석을 포기했다

실험은 망가졌고, 나는 아닌 척했지만 사실 마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by 지수로그

HPLC 분석 중이었다.
시스템적합성 조건으로 %RSD를 확인하던 중,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바이알을 같은 조건으로 세 번 주입했는데,
피크는 심하게 흔들렸고
%RSD는 기준을 초과했다.

단순 오차라고 넘기기엔
너무 뚜렷하고 반복적인 문제였다.


명백한 기기 문제였다.
하지만 실패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데이터는 안 나왔고, 일정은 밀렸고,
나는 두 번의 재분석 끝에 실험을 접었다.

‘기계 때문이잖아’라고 말하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샘플을 다시 올렸다.
분석 조건은 바뀐 게 없었지만
나는 어제보다 조용하고 신중했다.

이번엔 피크가 고르게 떴다.
%RSD도 기준 안에 들어왔다.
숫자를 보는 순간
긴장이 녹아내렸다.
실험은 끝났지만,
나는 아직 조심스러웠다.


분석은 반복이 아니다.
망가졌던 날에도,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힘이다.

나는 그날 분석을 포기했지만
다음 날, 다시 실험대를 마주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분석자는 언제나,
기기보다 먼저 회복해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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