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아이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다녀왔다.
더운 날 아이와 나들이 다녀올 곳이 마땅찮아 시원한 실내면서 교육에도 도움이 될만한 곳으로
찾아간 것인데, 오히려 나에게 감흥을 주는 곳이었다.
내가 지금 우리 아이보다 더 작았던 80년대,
우리 집에 있었던 석유곤로와 다이얼 유선전화기, 연탄집게 사진, 럭키치약 같은 전시물들이
씁쓸하고도 몽글몽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키오스크를 눌러 일제시대 유행가 '사의 찬미'도 들어보았다.
윤심덕의 구슬픈 음색이 흐르자 서울 한복판에서 경성시대로 타임슬립이라도 한듯 했다.
요즘 쏟아지는 노래들보다 백 년 전의 유행가가 훨씬 귀에 감기는 것을 보면,
내 정서는 여전히 구식인 것 같다.
나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다. 한번도 신문물에 얼리어답터마냥 빠르게 반응해본 적이 없다.
요즘은 그렇게 빠른 사람들이 유튜브며 가상화폐며 신문물을 이용해 돈도 많이 번다는데,
시간과 노동을 제공해야 먹고 사는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나 같은 사람은 시대가 변해서 더이상 신문물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때야 겨우 억지로 시도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구식인간인 나에게도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지금도 여전히 '가족'의 전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에는 '어린이'를 주제로 한 무료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어린이 시절은 벗어났지만, 우리 아이는 아직 역사보다 어린이 전시가 더 재밌는 모양이었다.
특히 전시장 입구에 조이스틱을 조종해 <어린이 생활계획표>를 클릭해보는 콘텐츠가 있었는데,
아직 키만 큰 녀석이라 이런 게 재밌는지 조이스틱을 움직여 생활계획표의 일정을 하나하나 다 확대해보는 것이었다.
1일 생활계획표의 <놀이> 시간을 클릭하니 학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와 함께 야외에서 노는 어린이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평일인데 얘네 부모는 일하러 안 가나보다"
아이의 표정을 살피던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림책 등에서 '가족'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까 표정을 살피곤 했는데, 중학생이 된 지금도 어쩐지 아이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내 눈에는 아직도 꼬맹이 같아서.
저녁식사 후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도 있었다.
조이스틱을 갖다대고 버튼을 누르자 역시나 소파에 앉은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가 등장했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웃는 엄마와 아빠. 우리 아이는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이혼과 재혼이 예능프로그램의 소재가 되는 시대인데, 아이가 조그마했던 시절에 비하면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가족에 대한 개념도 바뀌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의 전형'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tv, 광고, 잡지, 드라마, 전시장, 그리고 그림책과 동화책에 나오는 가족의 모습 말이다.
얼마 전만 해도 아빠, 엄마, 그리고 2명의 자녀가 있는 '4인 핵가족'이 가족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면
요즘은 출산율이 낮아져서 그런지 1명의 외동 자녀가 있는 '3인 핵가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최소 국민평형으로 불리는 84제곱미터, 25평 이상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반려동물과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집안을 살펴보자. 부모가 외벌이를 하든, 맞벌이를 하든 상관없이
주로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고, 아이들은 바닥에서 놀고, 엄마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개인이 지향해야 할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모델이 있다는 건 우리 사회의 유지 발전에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그 최소한의 가족 단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래서 그 최소한의 기대치조차 충족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 것만 같다. 이제 시대가 변해서 대도시의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 가까이 되고, 이혼율도 높은데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딩크족도 많으니 더이상 '가족의 전형'이란 건 없다고 누군가 주장한들, 우리 사회의 곳곳에 가족 모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202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어린이 전시장에서처럼.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수업시간 때 있었던 일이다.
중년의 담임 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우리 가족의 모습 그리기'를 시켰다. 우리 아이가 집에서 주로 보는 풍경은 퇴근 후 거실에서 tv를 보거나 청소하는 아빠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이혼한 엄마는 다른 집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튀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을 가진 우리 아이는 할머니 대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다. 아이의 생각에 보통의 엄마란 우리집 싱크대 앞에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몇 년 전, 교과서의 남녀 성역할이 고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교과서 그림 속 '돈 버는 아빠, 살림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고정관념으로 주입된다는 것이다. 다행이 이런 점들을 발견했고, 시정한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그러나 교과서뿐 아니라 그림책이나 동화책만 펴도 대부분 아빠와 엄마가 한 집에 함께 있는 풍경이 등장한다. 아이가 어릴 적 동화책을 고르다가 '분홍색 문'이 달린 엄마 없는 집이 소재로 나오는 동화가 있기에 반갑게 펼쳤더니, 그건 엄마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의 현실과 아이가 보는 책의 내용이 가끔이라도 비슷하기를 바랐다. 무릇 독자들이란 책 속에서 스스로를 비추어보게 되니까. 재밌는 책의 내용처럼 현실 또한 즐겁게 인식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과 드라마에는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가족 모델이 등장하고, 한쪽 부모가 없는 가정은 서글프게 그려진다. 예능 방송에서는 이혼했다는 이유로 희화화되기도 한다. 우리 아이가 현실과 일치시키고 공감할 만한 콘텐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와 함께 가족 모델 즉 아빠와 엄마, 자녀가 함께 있는 상황들을 접할 때마다 "모든 가족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라는 말을 하곤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아빠의 성을 물려받지만,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는 엄마의 혈통을 이어가기도 한다고. 또 자연의 동물들은 대부분 엄마 중심의 가족을 이룬다고. 우리집은 엄마와 아빠가 각자의 집에서 지내고 함께 너를 돌보지만, 어느 집은 아빠와 아이가 둘이서만 살기도 한다고. 할머니나 친척과 사는 아이도 있고, 부모 없이 형제들과 사는 아이도 있다고. 모습은 다 다르지만 모두 똑같이 '가족'이라 불린다고.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중계동에 있는 시립미술관에 아이와 구경갔을 때, 건물 입구에 치마 입은 어른과 어린 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모양의 안내표지가 세워져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입장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릴 적 가족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아이에게 머물러 있었던지, 그 표지를 보고 우리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표지는 좀 이상해"
"왜?"
"아이가 아빠랑 올 수도 있는데 그림에는 엄마만 있잖아"
"우와, 정말 그러네! 네 말이 맞아"
많이 개선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빠 출입 금지' 팻말이 붙은 수유실이 있다고 한다.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들이 불편할까 붙여놓은 것이겠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아이를 데리고 외출해 분유 먹일 장소도 없다는 뜻이 된다. 아빠도 혼자 육아할 수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고려했다면, 모유수유실과 분유수유실을 따로 분리해 엄마와 아빠가 모두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수유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수유실 출입 문제는 성역할과 가족의 전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그 집에 누가, 몇 명이 존재하고 집안의 어떤 장소에 있느냐가 가족의 기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파트 국민평형처럼 똑같은 모습의 전형적인 가족뿐 아니라,
다양한 집에 살며 다양한 유형의 양육자들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족 형태의 행복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교과서와 tv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와 살아서 행복하고, 엄마와 살아서 행복하고, 또 부모와 한 집에 살아서 행복한,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그저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