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히어로, 혹은 빌런의 탄생 -
16화 히어로, 혹은 빌런의 탄생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가장 큰 전광판. 전라도 고창 지역의 ‘복분자와 수박 축제’ 광고가 갑자기 멈추더니 화면에 히어로가 등장했다.
“우와, 히어로다!”
“어디, 어디?”
버스를 기다리며 더위와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복분자의 보라색, 수박의 붉은색이 채우던 화면은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한 도시의 색깔로 알록달록하게 바뀌었다. 느긋하게 흐르던 영상은 마치 3배속으로 설정을 바꾼 듯 속도감이 올랐다.
|속보|
[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괴물 출현 ]
터미널 안 사람들의 시선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일제히 전광판으로, 혹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향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 위해 고속버스에 올라탄 손님들과 시동을 걸고 곧 출발할 준비를 하던 운전기사들마저도.
편의점에서 생수를 고르던 후성도 히어로가 나타났다는 웅성거림을 들었지만, 평소처럼 그러려니 하고 제 할일을 이어갔다. 후성은 히어로를 걱정하지 않으니까. 그의 활약상은 보라색 피로 물든 괴물의 사체와 피해자가 흘린 붉은 핏물과 벽에 튄 살점들을 치우며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머릿속엔 희솔이의 약값 60억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이니까.
후성은 냉장고 안 생수들의 가격표를 모두 훑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1+1 행사를 하는 생수를 발견했다. 손님들도 이 생수만 사갔는지 냉장고 안에는 딱 두 개의 물병만이 남아있었다. 후성은 얼른 두 개 중 한 개의 물병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남은 한 개의 물병을 마저 쥐려는 순간
‘어?’
누군가의 손이 그 물병에 먼저 닿았다. 물병 위에 얹힌 두툼한 손과 팔뚝을 따라가니 시선이 저절로 사선 위로 올라갔다. 키도, 덩치도 손처럼 크고 두툼한 남자가 후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운 날 몸을 다 가린 검은색 옷에, 물 빠진 검은 챙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서 더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가져가세요”
남자가 물병을 후성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원 플러스 원이라 이게 마지막인데요......”
후성은 남자의 기에 눌려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가져가시라고요”
분명 마지막 남은 1+1 생수를 양보하겠다는 말인데,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는 마치 후성에게 명령을 하는 듯 했다. 학창시절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일진들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후성은 얼른 그가 건넨 물병을 받아들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옆에 있는 다른 회사의 생수병을 손에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후성은 일부러 진열대를 기웃거리며 그가 뒤돌아보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계산대로 향했다. 남자가 먼저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나설 때였다.
날렵한 체형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여자가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법정에서 유리한 진술을 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할 때 고지해야 하는 미란다 원칙이었다. 차갑고 묵직한 감각을 느꼈을 때, 남자의 손목에는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에게 수갑을 채운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다.
“기 형사님? 이게 뭡니까?”
남자의 물음에 대답한 건 기예안 순경의 뒤에서 나타난 오창수 반장이었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숫총각 행세를 해.
너 임마, 어디로 도망가려고 했어?”
아마도 남자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후성과 편의점 직원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그들을 쳐다보았다.
“형사님, 갑자기 왜 이래요? 제 아내와 우리 애는 찾았습니까?”
남자는 기예안 순경을 향해 물었지만, 이번에도 오 반장이 대답을 가로챘다.
“궁금해? 궁금하겠지!
여우같은 아내, 토끼 같은 자식이 지금 어디 있을까?
취조실로 가서 사이좋게 얘기해보자고”
실종된 아내와 아들의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철수는 어떤 반응을 할까? 기예안 순경은 아직 조철수의 죄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조철수의 집에서 느꼈던 단란한 분위기와 아이에 대한 애정이 담긴 사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가지 증거가 지목하고 있는 조철수를 옹호할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혀로 내뱉는 말과 드러난 겉모습만으로 ‘호모 사피엔스’를 믿는 건 매우 위험하니까. 그저 조철수는 아직 피의자 신분이니, 그가 범인인지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의 질문은 ‘조철수가 범인일까?’가 아니었다.
‘조철수가 아내와 아들을 죽일 만한 사람일까?’
본성이 선한 사람이라면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반드시 자수하고 반성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증거와 알리바이, 사건의 논리적 재구성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도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해서 결론이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니까.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이끌어낸 법정 다툼의 결론도 오판이 얼마나 많은가?
언젠가부터 기예안 순경은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가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말보다 행동을, 외모나 조건보다 표정과 눈빛을 보고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다.
그건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경찰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하려면 지식과 논리보다 본질을 꿰뚫는 감각이 필요했다. 인간은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이상한 동물이니까.
그녀는 호모 사피엔스를 사회에 유해한 부류와 무해한 부류로 구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 감각을 키워갔다. 노련한 베테랑 형사들이 한눈에 사람을 파악하는 ‘촉’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길을 그녀도 본능적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는 과정에는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사람의 본질을 판단할 때 그의 배경도 염두에 두어야 할까?’
오 반장이 말하는 ‘더러운 피’라는 표현은 확실히 거북하지만, 나쁜 가정환경은 사람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철수의 아버지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일상적으로 때렸고, 10대 때부터 중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형에게서도 배울 점이라곤 없었다. 조철수를 데리고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그의 어머니는 얼마 안 가 재혼했지만, 재혼한 남자 역시 그를 학대한 정황이 있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아이가 반사회적이고 유해한 어른이 되는 건, 평범하고 무해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을까?
“형사님, 그게 무슨 뜻이요? 지금 제 식구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겁니까?
어디 있어요? 말해주세요, 어디 있냐고요!”
“에헤이, 진정해. 쉿!”
“형사님, 제발 좀!”
“사람 많은 데서 부끄럽게 왜 이래. 취조실에서 조용히 얘기하자니까?”
조철수가 큰 소리를 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쏠리기 시작했다. 오 반장은 얼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아들의 행방을 물으며 버티는 조철수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몸을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조철수를 기예안 순경이 붙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조철수의 호주머니에서 무언가 흰 종이들이 팔랑거리며 빠져나갔다. 기예안 순경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진 그것들을 흘끗 쳐다봤지만, 조철수와 함께 저만큼 앞서나간 오 반장을 바로 뒤따라갔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은 금세 후성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후성은 뒤늦게 물 값을 계산하고 편의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그에게 1+1 생수를 양보한 남자가 흘리고 간 것들 중 하나를 주웠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명함에는 누구나 알 만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 홀리데이 나이트
차은우 ]
‘차은우? 잘생긴 연예인하고 이름이 똑같네?’
그때였다.
[삐이이이이이이]
‘응?’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앗!”
갑자기 고막을 울리는 엄청난 진동을 느끼며 후성은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귀가 시끄러운데, 이상하게도 터미널 안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온해보였다. 이명인가?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그냥 몸이 피로해서 그런가?
후성은 곧, 이것과 똑같은 소리를 오늘 아침에도 들었음을 기억해냈다. 고막을 때리는 진동의 강도가 너무나 달라서 같은 파동을 가진 소리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후성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진 괴물 사체 처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삐이이이’
갑자기 귀청을 울리는, 그러나 전혀 아프거나 괴롭지 않을 정도의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은 확실히 생소하고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한, 마치 운명적인 존재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성은 희솔이를 성추행한 수학학원 원장을 때린 후부터 온몸의 감각을 한 곳에 집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공격에 움츠러들고, 누군가의 폭언에 입이 얼어붙고, 누군가의 표정에 심장이 얼어붙는 그가 처음으로 맞서기를 결정한 순간이었다.
그 최초의 각성은 괴물의 몸에서 나온 벌레에 물린 후 그의 감각이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묘하면서도 짜릿하게 다가왔다. 그건 마치 길 한복판에서 노이즈캔슬링이 잘 되는 이어폰을 끼고 영화 속 최악의 빌런의 노래를 귀가 뚫리도록 큰 음량으로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온몸이 전율하는 중독적인 흥분이었다.
그때부터 후성은 수시로 감각을 집중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먹을 때, 설거지를 할 때, 길을 걸을 때, 지하철에 탔을 때, 괴물 사체를 치울 때, 몸을 씻을 때,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원할 때마다, 아니 원하기 1초 전부터, 본능적으로 감각을 집중하고 예민함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강력한 상태는 재수 없게 행동하는 누군가에게 맞설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된 상태였다.
그는 다시 감각을 집중해 이 진동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추적했다. 그 얕은 진동을 따라 반대편 골목까지 걸어갔을 때, 후성이 발견한 건 이설윤의 검은고양이 ‘까미’였다.
‘어?’
이제야 후성은 까미 역시 자신을 문 벌레를 물고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지금, 같은 파동을 가진 소리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진동을 가진 경고음이 그의 고막을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