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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오리 Jun 18. 2024

안락한 살해, 고통의 종결


Sanctuary. 생추어리. 안신처. 피난처.



영화 <생츄어리>의 내용은 제목과는 다르다. 배수로 속 고라니 사체를 시작으로 영화 내내 동물들은 죽어나간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의해 신체 손상을 입은 존재들은 인간에게 잡혀 “안락사” 논의 대상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구조”라고 불린다. 살해에 ‘안락’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구조된“, 안락하게” 살해된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할까.


혼자 지내서 외로울까 봐 “안락사” 논의 회의에 올라온 하이에나의 목숨. 날지 못하는 부엉이. 디스크가 있는 곰.


안락하게 살해하는 것이 동물에게 베풀 수 있는 어떤 은혜라는 듯, 영화는 고통의 종결을 최우선으로 이야기한다. 고통을 종결하는 방법이 정말 살해일까? 영화는 신체 손상의 해결책으로 꾸준히 “안락사”를 보여준다.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한다는 서사.


날지 못하는 새가 새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해 지퍼 백에 잠겨 냉동고에 들어갔다면, 이족보행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어떠한가? 종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개체의 삶은 당연히 불행한 것인가?


화면 속에 등장하는 활동가들은 ‘생추어리가 있다면’ 이라는 말을 한다. 동물원이냐, 생추어리냐의 문제일까. 적어도 이 영화에서 둘의 차이점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해보인다. 영화의 제목은 아마 <비장애중심주의>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신체 손상에 대한 혐오가 있는 한 생추어리에서도 거주민은 계속 살해될 것이다.


무엇이 진짜 고통의 종결일까?


살해는 살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안락사” 역시 하나의 휴메인 워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외로워서, 디스크가 있어서, 두 다리로 걷지 못해서 살해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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