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과의 관계가 편하다. 좋다. 이 감정이 대상화에 기반한 것일지도 몰라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지난 몇 달간 일어난, 지금도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 와중에도 동물 돌봄의 시간을 몇 배로 늘려만 가는 것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양이와, 포동이와, 열무와, 피터와, 잔디와, 새벽과, 앵두와, 숯댕과 나는 인간 종의 언어를 나눌 수 없다. 내가 말해도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만약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나의 반복, 나의 습관을 그들이 이해한 것, 다른 손짓, 발짓 같은 비언어적 표현 속에서 맥락을 이해한 것에 가깝다. 그들의 표현을 내가 이해하는 방법도 비슷하다.
산책 후 내가 숯댕이를 다시 마당에 묶어두고 떠나야 할 때, 숯댕이는 구슬픈 소리로 마을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묶인 줄이 그의 목을 조여와도 최대한 나에게 가까이 닿으려 안간힘을 쓴다. 나는 그가 외치는 언어를 정확하게 인간의 워딩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그게 어떤 것을 뜻하는지 안다. 그의 목에 연결된 쇠사슬이 짤랑거린다. 쇠사슬로도 전달된다.
산속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온갖 버려진 물건을 다 탐색한 후 나에게 달려오는 숯댕이는 그 헥헥거림으로 들뜸과 흥분을 표현한다. “저기에서 좋은 냄새가 났어!”라는 것인지, “앵두가 보면 좋아하겠다!” 같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그가 쏟아내는 감정과 흥분을 함께 나눈다.
피터는 나를 발견하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고를 보낸다. 하악- 치아가 하나도 없지만 나를 겁준다. 내가 조용히 다가가 그릇을 닦고 물을 채워주고, 그의 밥을 준비하면 거리를 두고 앉아 큰 눈으로 주시한다. 눈을 꿈뻑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정 거리에서 기다린다. 피터야 하고 합의된 적 없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 보기도 한다. 그 모든 행동은 직접적이다.
우회하지 않고, 쿠션어를 쓰지도 않는다.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 정제된 말, 따뜻한 언어, 비폭력적인 표현으로 본심을, 알맹이를 흐리지 않는다. 지금 일어나는 일, 앞에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싫은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내 손길을 피하기도, 요구할 것이 있다면 눈을 똑바로 보며 몸으로 표현한다. 몸을 내게서 멀리 옮기고, 나를 깨물고, 나에게 몸을 비비고, 나에게 몸을 던지고, 내 무릎에 앉고, 나를 코로 밀친다.
인간들과의 언어를 해석하고, 본심을 추측하고, 말과 행동의 괴리감 속에 질문이 이어지고, 숨겨진 의미를 알기 위해 분석하는 그 모든 것들.
싫다고 나를 꽉 물고, 할퀴고 성내는 동물이 고맙다. 내 방에서 나가라고 코로 나를 밀치며 끄응- 소리를 내고, 나에게 기분이 상하면 나를 팽개치고 자리를 떠나고, 무리를 지어 나에게 날갯짓하며 다가와 부리로 쪼아댄다.
내가 하는 것이 맘에 든다고, 나의 방문이 즐겁다고 꼬리를 좌우로 흔들고, 배를 조심스럽게 긁으면, 몸을 들어 자리를 잡고 눕는다. 내가 궁금하다고 다가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도록 표현한다.
싫은 것이 싫다고 나를 물고, 몸으로 밀치며 폭력적으로 표현한다. 좋은 것은 좋다고 동의 없이 나의 신체에 접촉하는 ‘폭력’을 일삼는다. 알아들을 수 있게 단순하고 쉽게 그 순간에 알려준다.
내 살을 물어 피 흘리게 하고, 멍들게 하기도 하지만 가스라이팅 하지 않는다. 이 폭력은 복제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이것은 엄연히 폭력이지만, 동물이 나에게 하는 이 행위는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반대로, 비폭력적 방식이 더 큰 폭력으로 와닿기도 한다.
단순히 비언어적으로 소통하는 관계라서가 아니다. 비언어적 소통은 인간 간에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동물과의 소통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 사회(주류든 비주류든)‘의 영향을 받지 않은/덜 받은/거부한 어떤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동물과의 관계 맺음이 더 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