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가 출산을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임신 상태였다. 수의사가 예상한 날짜보다 이르게 출산한 앵두로, 모두가 당황하는 날들이었다. 앵두가 들개 포획틀에 잡혔다면, 임신한 여성이 죽임당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무턱대고 출산한 앵두 때문에 보금자리를 뺏긴 두 명의 개는 화가 잔뜩 났다. 공간을 뺏긴 개, 아기에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고양이들은 앵두에겐 위협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뒤늦게 수유실이 만들어진 후, 앵두도, 인간들도 한시름 놓았다.
앵두를 돌보기 위한 체력적, 경제적 일들 외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 일어났다. 자유롭게 살던 개, 다른 동물을 사냥감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개에게는 갑작스럽게 생긴 식구라는 개념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앵두는 ‘순치’라는 과정을 겪는 중이다.
인간은 앵두에게 이제 동물을 사냥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전 보호자의 방치로 들개의 삶을 살았던 앵두에게, 사냥은 생존 방식이었다. 앵두는 생존 방식을 바꿔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앵두가 낳은 아기는 ‘퉁시리’라 불린다. 단 한 명만 태어나 앵두의 모유를 독점해서 배가 빵빵하다. 앵두가 단 한 명만 출산한 것을 두고 인간 여성들은 안도했고, 마을의 인간 남성들은 아쉬워했다.
앵두는 과거에도 출산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퉁시리가 모유를 떼고 나면, 앵두는 불임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앵두가 세 번째 출산을 하게 둘 수 없다. 이 마을에서 개의 미래란, 결박된 채 매일 한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마당개가 더 늘어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머리로 아는 동물권과 현실은 역시 다르다. 당사자가 또 다른 임신과 출산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실외사육견 중성화 수술 지원 사업>을 알아보았다. 들개가 설치고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한 예산.
앵두가 수유를 하며 퉁시리를 돌보는 동안, 최근 강아지 셋이 마을의 한 식당 앞에 유기되었다. 그중 한 명은 ‘분양’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소유물이 되었고, 두 명이 남아있다.
동물해방에 언제나 함께 이야기되는 ‘인간해방’. 그런데 잘 모르겠다.
어떤 종의 앞날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데, 여기서 더 해방되어야 할까? 우리를 보는 다른 종들이 뭐라고 느낄까.
나는 해방에서 멀어지고 싶다. 나의 빈곤도, 정신 장애도, 정체성도. 해방을 말할 만큼, 동식물 종만큼 억압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냥 우리끼리의 싸움에 갇힌 것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