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동물 산업 현장에 가면 그곳의 노동자들과 갈등이 생긴다. 폭염의 도살장 앞에서는 물을 주려는 이와 주지 말라는 이, 흑염소 경매장에서는 사진을 찍으려는 이와 막는 이. 착취의 실태를 기록하지도, 피해자를 돕지도 못하게 하는 이들을 아무 감정 없이 대하긴 어렵다. 인류애를 가장 많이 상실하는 곳.
언젠가 비질에 대한 안내에서 축산업 노동자는 적이 아니라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나는 자주 무례한 사람이 되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발을 디뎌야만 할 것 같았다. 이제는 그들이 적이 아니라는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노력 중이다) 그들이 우리와 연대를 하기보단 현실 고발을 방해하는 역할을 함에도.
그건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몇 달 전, 기자회견을 하러 지방에 내려갔을 때다. 기자회견은 집회 신고의 의무가 없지만, 당시 시청 직원들이 활동가들을 막았다. 마찰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사진을 찍었다. 활동가는 제지하는 직원을, 직원은 활동가를. 그 상황에서 진짜 ‘적’은 빠져있었다. 약자와 약자의 싸움만 있었다.
시위나 행진 현장에서 ‘권력’의 편인 이들과의 마찰은 언제나 있다. 경찰은 무리로 존재하고 공권력을 행사하지만,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공무수행 중 초상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로, 그들의 얼굴은 촬영되어 버젓이 게시되기도 한다. 축산업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비질 현장에서 촬영된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게시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경찰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대해서, 축산업 노동자가 비인간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넘어 살해해서, 그들은 쉽게 악마화된다. 각각의 시스템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곳에 서서 일차원적 분노를 받아내게 된다.
많은 동물 단체의 고발 영상에서, 웃으며 동물 폭행과 도살을 ‘즐기는’ 소수 노동자들의 모습이 편견이 되기도 한다.
물론, 아예 초상권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있다. 트럭에 실린 몸, 식품이 되어 전시된 몸들이 그렇다.
고통의 순간을 촬영하는 것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남긴다.
SNS에 게시되는 수많은 동물 게시물들에서 동물은 그대로 보이지만, 주변의 인물이나 보호자는 어김없이 초상권의 보호를 받는다.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사진을 게시할 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본명을 숨긴 채 ‘활동명’을 사용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체가 시작된 방법, 활동가 대부분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 돌보는 동물이 ‘돼지’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단체 자체가 혐오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거주동물인 새벽과 잔디의 초상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가는 자신의 개인 정보와 얼굴을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비인간은 선택지가 없다. 생년월일부터 몸무게, 성격, 이름 등 온갖 정보가 공유된다.
그래서 활동가들 중 자신의 초상권을 포기하는 이도 있다. 나도 용기 내 얼굴을 종종 드러내기도 해 봤지만, 다시금 숨게 되었다. 나는 나를 숨길 수 있다.
<동물의 자리> 저자 중 한 명의 인터뷰에서 와닿았던 문장이 있었다.
프레시안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솔직한 동물을 우리는 보지 못했다?>
질문은 너무 많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압도되지 않아야 이 운동도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