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트랙터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밤새 힘을 보탰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멋지다 생각하면서도, 개들이 구조되기까지 며칠 동안, 살이 다 쪄서 언제 도살될지 모르는 상태의 개들이 팔려나가는지 아닌지, 잠복하며 현장에 있을 이는 없었다는 것에 가슴이 답답했다.
트랙터가 막히기 하루 전, 나는 감기약을 때려 붓고 그 마을을 찾았다. 돌보는 동물들 밥과 물을 챙기고, 개농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마을을 오가며 친해진 할머니는, 늦은 저녁 개농장을 향해 가는 나에게 절대 혼자 가지 말라 신신당부했다. 마을 믿지 말라고.
먼저 들른 임보처에서 개들이 싸웠고, 나는 피가 나는 손가락을 꼭 쥐고 개농장으로 향했다. ‘캣맘’ 생활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낮보다 익숙해졌음에도 시골의 저녁은 도시의 저녁과 달라 조금 긴장되었다. 띄엄 띄엄한 주황색의 가로등이 전부인 마을에서 조금 무섭고, 외로웠다. 원래 계획은 그 개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입양을 위한 사진까지 찍는 것이었으나, 할머니의 당부가 자꾸 떠올라 주변만 서성거렸다.
망을 봐줄 사람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때 신고해 줄 이도 없었다. 벽 너머로 개 여럿의 소리가 들린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개들이 여전히 팔리지 않고 그곳에 있음을 알았다.
개농장을 발견하고 며칠간,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개가 잔인하게 도살될 수 있다는 것에 분노한 사람들.
그 후에 남은 것은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기시감이 들었다. 2년 전, 한 빌라 주차장에서 아기 고양이가 벽에 던져져 살해당했을 때, 사람들이 분노했던 것이랑 닮았다.
많은 동물이 그렇게 죽고 있는데.
나는 왜 개농장의 개를 보고 구조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매일 횟집 수조를 그냥 지나치면서. 횟집 수조의 물살이를 ‘구매’하면 너무나 손쉬운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운동의 의미는 없다 해도.
만약 그 개들이 각각 입양되어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해도 끝이 아니다. 더 이상 ‘불법’ 개농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된 농장주가 ‘합법’으로 그 빈 뜬장에 흑염소를 가두면?
개농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오리들의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달라진 덕분에 운동도 앉은자리에서 가능해졌다. SNS에 피드만 올리면, 아주 적은 품을 들여 선동하고, 도울 수 있다. 운동을 시작하며 SNS의 힘을 실감했다. 적은 에너지, 큰 파장. ‘효율’의 끝.
그러나 돌봄은 SNS로 되지 않는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 그곳에 가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파의 날씨에 얼음을 깨고 물을 새로 부어주러 가는 것, 한자리에 묶여 있는 개가 덜 추우라고 열심히 같이 뛰어다니는 것, 춥고 덥고 외진 현장에 내 일상을 포기하고 가는 것, 침과 피가 묻은 담요를 빨래하고, 새것으로 가져다 놓는 것. 그런 게 필요하다. ‘이벤트’가 아닌 일상으로.
동물의 생을 책임지는 것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일은 구조 현장에 갈 예정이다. 개들은 뜬장에서 벗어나 시설로 향하게 될 것이다. 전기 꼬챙이가 아닌 약물이라는, ‘인도적’ 죽음으로.
나는 그 광경을 잘 지켜보고, 애도하고, 기록을 남기며, 현장에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