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숯댕과 산책할 때, 그는 시작부터 미친 듯이 흥분하고 나를 끌어당겼다. 목의 줄이 그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끌고 갔다.
커억 커억.
목이 졸리는 소리는 산책 내내 들렸다. 이 시기 나는 넘어지고 미끄러졌다.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쳐서 땅에 드러누우면 아랑곳 않고 더 달리자고 내 손목이 빠질 듯 줄을 당겼다.
앉아서 쉴 줄 모르는 숯댕이 버거워 핀잔을 주자 동료가 말했다. “숯댕이는 맨날 묶여있으니까.”
그와 산책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고,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녹초가 되어 기절했다.
당시 숯댕이에게 나는 잊을 때쯤 찾아오는 ‘행운’ 정도였을지 모른다. 한 달은 매우 지루하고 긴 시간이다. 나는 숯댕이에게 구원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숯댕이가 버거웠다. 산책 후 목줄을 다시 쇠사슬에 걸고, 가방을 메고, 뒤돌아가면, 와이어줄을 지탱하는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몸을 던지며 우는 숯댕의 목소리가 무서웠다.
드르륵드르륵. 쇠사슬이 나무집에 부딪히는 소리.
가을.
피터가 수술을 받았고, 앵두를 처음 만났다. 숯댕의 집으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지내게 된 앵두는, 전부터 그곳에 살던 동물들과 크고 작은 마찰로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앵두의 처지가 불안한 나는 자주 앵두를 만나러 갔다. 그 김에 이웃인 숯댕 산책까지 하게 되다 보니 산책 빈도가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세 번이 되었다. 촘촘해진 빈도는 우리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산책이, 어쩌다 한 번 오는 행운이 아닌 일상이 되며 숯댕이는 집착을 조금씩 놓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전력질주였던 과거의 산책과 달리 나와 비슷한 걸음 속도, 조금 빠른 걸음 정도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또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숯댕이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결박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도.
동료는 애도제에 숯댕이의 목줄을 가져다 놓았다. 억센 가죽 끈은 늘 숯댕의 목을 조였지만, 반가움, 신남, 흥분, 두려움, 분노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목에 줄을 묶고 싶지 않아서 하네스를 샀다. 이제 너의 허리와 내 허리를 묶는다. 우리는 친구일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것이 우정일 수 있을까?” (글_세원)
여전히 나와 숯댕의 관계는 구원 서사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우리는, 언젠가 이 서사로부터 자유롭게 달릴 수 있을까? 그리고 우정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