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돌봄을 시작한 이래 하양이를 입양하려는 고민을 여러 번 했다. 그곳의 다른 고양이들과 달리 어울리는 무리가 없이 홀로 있고, 사람을 피하지 않는, 동물학대 처벌이 약한 한국에 살기에 조마조마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집순이’였다. 스티로폼 집 안의 포근함을 좋아하는 하양이는 출석률이 99%에 달한다.
언제나 집에 가면 하양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하양이가 최근부터 집에 들어가 있지 않는 날들이 잦아졌다. 며칠 실종설이 돌기도 했다. 사라지기 전, 그의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 원인인 듯했다. 최근부터 이주를 고민하면서 하양이의 입양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하양이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곳에서만 세 명의 고양이가 사라졌었기에 초조한 날들을 보냈다.
약 일주일 만에 하양이를 만난 다음날, 나는 그의 밤산책에 멋대로 동행했다. 새로운 은신처가 있다면 그곳을 알려달라고.
따라가다 보니 하양이의 행동반경이 내 예상보다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택가를 어슬렁거리고, 도로가 한눈에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인도를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그러다 껑충거리며 달리고, 수로에 쏙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올라 언덕을 오르더니 나무를 탔다. 종종 ‘우다다’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사방팔방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이곳의 고양이들을 입양하기 위해 고민하다가도 포기하게 되는 지점은 늘 같았다. 나는 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캣휠이나 깃털 장난감, 캣타워로는 저런 질주와 점프를 할 수 없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는 말은 감금 돌봄을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 영역이란 것이 30평 내외의 ‘실내’로 한정되는 것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공원의 고양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 빈 공원에서 우다다하고, 바위와 나무를 타고, 장난을 치고, 서로를 쫓기도 한다. 이 행위를 실내에서 한다면 집이 멀쩡할 리가 없다.
언젠가 생추어리에 관한 공부 모임에서 ‘위험을 감수할 자유’를 듣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동물, 특히 감금 동물은 이러한 자유를 애초에 차단당한다. 생추어리의 동물이나 반려 동물 역시 비슷하다.
나는 하양이를 모르고, 하양이도 나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분만 안다. 걷는 습관, 냄새, 반가우면 하는 말과 행동.
이 작은 부분으로 내가 누군가의 삶을 바꿔도 될지 여전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