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앵두의 불임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수술 3일 전부터 튼실(퉁실에서 개명했다)이를 앵두로부터 격리를 해야 한다며, 왕진 온 수의사가 튼실을 데리고 갔다. 수의사 집에서 지낸다는 튼실이가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영문을 모른 채, 딸을 갑자기 잃어버린 앵두는 혼란스러운 며칠을 보냈다.
예정대로 앵두는 수술을 받았고, 그날 튼실은 기본 접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앵두와 튼실은 나의 이름으로 ‘동물 등록’이 되었다. 둘은 법적으로 나의 ‘사유재산’이 되었다.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튼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던 수의사는 동네의 다른 주민에게 튼실을 줘버렸다고. 개를 ‘입양’하는 일이 당근마켓 거래처럼 쉬운 것이 그 마을의 분위기였다. 그에겐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튼실이를 데려오라는 우리의 요구에, 그는 앵두가 수술 후 3일 정도 회복하면 튼실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찝찝한 기분을 누르며 튼실이가 올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튼실이는 오지 못했다.
튼실을 며칠 동안 데리고 있던 사람이 ‘죽어도 못 보내’라고 하는 상황이라고. 매일 튼실이만 찾는 앵두로 인해, 우리는 차라리 앵두까지 함께 그 집에서 사는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앵두와 튼실의 입양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숯댕과 앵두는 긴 산책을 함께 했고, 그날 저녁 나는 수의사의 차에 앵두와 함께 타고 그 집으로 향했다. 튼실이가 입을 옷, 나무 장난감, 껌을 바리바리 싸들고.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다. 숯댕이와 앵두가 다시 함께 산책하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앵두에게는 딸을 만나는 것이 더 절실해 보였다.
튼실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은 이미 개가 여럿 있다고 했다. 개를 잘 키울 사람이라고. 심란함과 설렘이 합쳐졌다. 앵두와 튼실이가 재회하고, 행복하게 살 거라 생각했다.
하늘이 깜깜한 저녁,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앵두는 낯선 풍경에 주저하며 버텼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져주며 따라왔다.
슬러시 같은 얼음 땅을 밟고 도착한 그곳은 음산했다. 울타리 안으로 보이는 커다란 개 두 명. 그리고 안 쪽의 비닐하우스에서 들리는 개들의 목소리. 절대 ‘여럿’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 앵두를 두고 올 수 없었다. 내부를 보진 못했지만 ‘호더’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누구도 나오지 않아 우리는 되돌아가야 했다. 우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고 싶었다. 앵두를 이런 곳에 살게 할 수 없었다. 튼실이도.
차를 타고 되돌아가는 길, 수의사는 그 집의 개가 20명 정도라 했다. 튼실이를 되돌려 받고 싶다면 ‘소송’을 하라고도 했다고. 뒷좌석에 함께 탄 앵두의 뒷모습을 보았다. 생모가 버젓이 여기 앉아있는데, 인간들끼리 이런다고?
보호처로 돌아온 후, 앵두는 익숙한 풍경에 조금 긴장을 푼 듯했으나 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앵두가 킁킁거리며 집 주변 냄새를 맡았다. 튼실이를 찾는 것 같은 그 행동에 숨이 막혔다. 튼실이를 어떻게 ‘구출’하지?
춥지 마라고, 까만 털이라 밤에 안 보여 밟힐까 봐, 꾸역꾸역 입힌 옷으로 너무 귀여워 보이게 한 내 탓일까. 호더가 수집하고 싶게 만든?
그날 밤, 나는 수의사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어쩌다 하게 된 ‘동물 등록’이 쓸모가 있었다. 나는 튼실의 ‘법적 소유자’라는 권리를 이용해야 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슬로건은 잠시 무시했다. 내 ‘물건’을 함부로 타인에게 넘긴 당신에게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이틀 내로 데려오라고.
문자를 쓰면서 천불이 났다. 앵두가 엄마고, 앵두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권리였다. 젖 한 방울 먹인 적 없는 인간들이 딸을 납치하고, 자기 딸의 거취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얼마나 징그러울까.
가축화된 동물에게 생모와의 관계 맺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동물 생모로부터 아기를 빼앗는 데에 익숙하다. 동물은 생모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아프게 낳은 내 새끼를 끼고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게 동물의 생모들이다.
계획된 출생은 고기나 젖을 얻기 위해 엄마로부터 아기를 빼앗는다. 예기치 못한 출생은 ‘입양’이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해피엔딩을 위해, 엄마와 아기가 분리된다. ‘독립’이라는 형태로 따로 살고 싶은지, 의존과 돌봄으로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입양은 동물의 생모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생모를 소유한 이로부터 이루어진다.
분리되는 존재들의 권리는 없다. 갑작스럽게 딸을 잃은 앵두도, 엄마만 졸졸 따라다니며 물고 뜯느라 어쩔 수없이 격리되어야 했던 튼실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