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농장에서 시보호소로 인계된 다섯의 개들을 위탁소로 보내는 날이었다. 다섯 개들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고,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었다.
한 사람이 세 명을 ‘입양’할 수 있어서 셋, 둘 나누어 입양 서류를 작성했다. 아직 얼굴도 성별도 헷갈리는 개 셋이 내 ‘소유’가 되었다. 월세 부동산 계약보다 간단한 서류로 나는 누군가의 삶의 ‘주인’이 되었다.
켄넬에 ’집어넣었다.’ 보호소 직원들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트렁크에 실린 개들의 모습을 ‘선물’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새벽 잔디가 이사할 때도 그랬다. 좁은 곳에 갇혀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몇 시간을 견뎌야 했다. 동물은 다리, 날개, 지느러미로 이동해야 하는 존재다. 탈것에 실려 보내지는 존재가 아닌.
한 시간가량 달려 위탁소에 도착했다. 켄넬을 열고 나오길 기다렸으나 대부분 켄넬에서 나오지 못하고 버티다 켄넬을 기울여 억지로 쏟아지듯 나왔다.
생전 처음 하는 목줄이 어색해서 온몸을 가누지 못했고, 설사를 했다. 다섯의 개 모두 감염되어 있었다. 여성 둘, 남성 둘, 마찰이 있는 남성 하나. 이렇게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 격리되었다.
바닥은 청소하기 편한 재질이었다. 개들은 계속 똥을 누고, 소변을 여기저기 봤다. 누군가는 계속 소변을 닦고, 똥을 치웠다. 세제 같은 것을 뿌리고 닦고. 효율적이었다.
각종 조건들이 그들에게 숙제로 남았다.
입양이 되려면 인간과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병이 없어야 한다. 순치되어야 한다. 어필해야 한다.
한 달 만에 퉁실이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보호처 개들과의 지속적 마찰로 인해, 앵두의 생활은 위태로웠다.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존재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앵두가 낳은 퉁실은 누군가의 집으로 쉽게 보내졌다.
법보다 공동체 구성원의 말과 마을의 분위기가 먼저인 곳, 누군가가 홧김에 한 말, 누군가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한 말, 왜곡된 소통이 뭉쳐져서 앵두와 퉁실은 다섯 개가 개농장에서 구조된 12월 23일, 강제로 헤어지게 되었다.
‘미친년’과 ‘정신병자‘가 멸칭으로 쓰이며 지목된 여성 아래서, 헤어질 당시 두 달 아기였던 퉁실이는 이제 어떤 모습일까.
앵두를 태우기 위해 펫택시를 처음 탔다. 떨렸다. 퉁실이를 데리고 있다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던 ‘마녀’가 맞는지,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도착했다.
커다란 솜뭉치 같은 퉁실을 알아보았다. 한 달 사이 퉁실은 놀랍게 자라 있었다. 숯댕이와 똑같았다. 잘 먹고 쑥쑥 큰 퉁실은 그곳에서 제일 체구가 큰 개 ‘밤이’의 적극적 돌봄과 인내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지낸 것이 보였다.
퉁실은 한 달 만에 만난 엄마를 깨물고 빨고 난리였다.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앵두도 반가움을 표했다.
귀찮음도 충분히 표했다. 다시 엄마의 요란한 그림자가 된 퉁실이와 앵두를 과하게 환대하는 개 ‘봄이’에게.
새벽 공간의 1.5배-2배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 앵두까지 20명의 개가 산다. 모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비인간 홈리스들이었다.
공간이 넓어 산책을 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활동량을 채울 수 있었다. 앵두가 땅을 파헤쳐서 그 안에 코를 대고 흙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을 종종 보았던 나는, 흙이 반드시 있는 곳에 앵두가 살길 바랐다. ‘갤러리’ 같았던 위생적인 위탁소와 달리, 지저분해도 앵두가 지내기에 좋은 공간임은 맞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것은 앵두가 자유롭게 달렸던 모습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있는’ 개가 혼자 산책을 다니는 것은 허용되는 분위기의 마을에서 지냈던 앵두는, 숯댕이가 짖으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나에게 숯댕이의 목줄을
빨리 풀어주고 산책을 가자며, 지그시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셋이서 산책을 하다, 자신이 지치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앵두였다. 나는 앵두의 자율성을 사랑했다.
새로운 곳에서 앵두는 ‘산책’을 하지 못한다. 산책이
애초에 필요하지 않도록 넓은 땅에 울타리로 막아뒀기 때문이다. 생추어리였다. 산책할 수 없는 새벽을 위해 넓은 땅에 흥미로운 지형지물을 인위적으로 갖춘 것과 같았다. 이 안에는 개를 죽이는 포식자가 없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는 개농장도, 개를 잡아먹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차들이 서행하던 이전 마을과 달리, 쌩쌩 달리는 차들이 기본인 도로가 바로 앞에 있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 벼르는 이가 있다. 생추어리 밖에서 돼지는 고기인 이들이 있는 것처럼.
앵두는 이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하다. 평생 이 안에서만 살아야 할 거라는 동료의 말. 가슴이 싸해지며 생추어리가 진심으로, 폭력으로 느껴졌다. 앵두가 ‘새벽’의 위치가 되었다.
새벽과 잔디는 더 나은 환경으로 왔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앵두도 그럴까? 온 산을 누비던 앵두가 이제는 특정 면적 안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앵두는 생추어리에 귀속됨으로써, 생존권은 보장받았지만 자유는 빼앗겼다.
“새벽이답게, 잔디답게”
그 말이 갑자기 이질감이 들었다. 앵두는 생추어리에서 앵두답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새벽은 새벽답게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인간 종과 달리, 자유냐 생존이냐,
둘 중에 하나만.
슬픔과 심란함으로 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앵두를 환대하던 봄이 옆에서 딸과 함께 자는 영상을 카톡으로 받아보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일은 새벽과 잔디가 있는 생추어리로 간다.
대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경계심이 많고,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이들을 돌보는 우리도 마녀가 맞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