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실한 사랑

어느 플라타너스 이야기

by 세라

장마철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온다.

평일 낮에 우산을 쓰고 천천히 비를 마주하는 것도 좋다.

여름의 아스파트가 열기 없이 흠뻑 젖은 느낌도 좋다.

사복사복 걷는데 문득 띄엄띄엄 어떤 자리들은 비에 젖지 않음을 발견했다.

덩그러니 마른자리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나무가 있다.

기다랗지만 몸집은 여윈 플라타너스이다.

지난봄 영문도 모른 채 손발이 다 잘려나간 플라타너스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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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듬지가 다 잘려나간 쪼삣한 나무.

풍성하고 우람했던 몸체와 머리칼이 사라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나무.

그 나무들을 보며 나는 올봄 내내 슬픔과 연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내 손이 빈약해서 항상 미안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나무는 나에게 말한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는 내가 살던 대로 내 자리를 지킬게. 늘 그렇듯 살아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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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는 예의 그 방법대로 산다.

죽음의 문턱에서 움켜 쥔 생에 강한 의지 앞에서 나는 안도감과 대견함,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보여주는 순도 100퍼센트의 충실한 사랑 앞에서 마음이 물결친다.




새로 태어난 연약한 가지는 새의 몫.

죽을힘을 다해 펼쳐 낸 손바닥만 한 이파리들은 우리의 몫.

다시 태어난 그의 충실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처음의 그것보다 더욱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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