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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Apr 16. 2018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책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책을 읽는 것만큼 구입하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책이 한가득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 매장에 파는데도 여전히 많다. 다행인 작년크레마 사운드를 구입하고 나서 종이책에만 머물러있던 시선전자책으로 많이 넘어왔다. 


뒹구는 책은 언제 잠 깨는가 @Workflowy


덕분에 집에 함께 동고동락하는 책들은 많이 줄었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책을 보고 '어머 이건 사야 해!'라고 외치며 구입 자체는 오히려 늘었다. 그래서 작년에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아직 서재에, 그리고 크레마 구매 목록에서 뒹구는 책들이 많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들이 냉장고에 가득 채워지고 매일 허기를 지우다 보면 손이 가지 않은 반찬들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버릴 수는 없기에 맛있는 반찬을 먹을 때 하나씩 꺼내 든다. 책도 밑반찬처럼 맛있는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퇴사하고, 여행을 떠나기 시간이 한없이 여유롭기만 하다. 이번 주는 떤 책을 꺼내먹을까? 읽지 않았던 책의 목록을 살피다가 책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에 넣고 카페로 왔다. 쌓인 작업을 하다 지루할 때쯤 책을 펼쳤다. 시를 엮은 시집인 줄 알았는데, 시인이 쓴 산문집이었다. 두께를 보니 금방 읽겠다. 끝이 가깝다고 생각하니 힘이 난다. 


점점 얇은 책만 좋아지고 있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책들은 패스트푸드와 같아서 허기만 지우고 맛을 느끼면서 먹지 않는다. 반면 단어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는 책들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수저에 밥을 올리고, 반찬을 올리고 국을 한 모금 마시는 것처럼 단어의 조화를 생각하며 꼭꼭 씹는다. 


SW 개발 일을 하면서 마감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다. 차라리 조금 무리한 일정이라도 기한이 확실히 정해져 있으면 어떻게라도 하겠지만 그런 마감이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월요일까지 수정해달라, 주말에 나와서 일을 끝내 달라 등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처음엔 얼마나 급했으면 그렇게까지 부탁할까 싶었지만 하고 나서 보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늘_박준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남들이 하는 일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하던 날이 있었다. 남들이 다 알만한 좋은 기업에 다니고,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차를 끌면서 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좋은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작아졌고, 더 비싼 외제차를 끌고 오는 사람이 나타나면 더욱 작아졌다. 빛나기 바쁜 20대의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_박준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고, 

혹 거리에 스친다 하더라도 아마 짧은 눈빛으로 

인사 정도를 하며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말들 역시 그들의 유언이 된 셈이다.


학창 시절 영원할 것 같은 친구들이 다른 학교에 진학하면서 잦았던 연락이 줄어든다. 아쉬움이 컸을 초반에는 자주 연락하고 종종 만나면서 아쉬움을 달랬지만, 지금 여기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로 허전함이 차차 채워지면서 자주가 가끔이 되고, 종종이 어쩌다로 둔갑한다.


고인이 된 사람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나 쓴 글이 유언이 되는 것처럼 앞으로의 내 삶에 개입하지 못하고 과거의 연에서 멈춘 사람들의 마지막 말이나 글이 유언이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마디가 그 사람을 추억하는 방법이 된다. 관계는 끊어졌을지라도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소설가 김 선생님_박준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에피소드였다.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한다니. 문장 자체가 따뜻하다. 


고독과 외로움_박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약속으로 한 주가 가득 채워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외연을 넓히며 사는 삶을 그리 길게 이어나가지 못한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나는 한 번에 많은 인연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혼자 걷는 것은 좋아하지만 시끌벅적한 술자리와 같은 무대에서 내려와서 홀로 집에 쓸쓸히 걸어갈 때 느끼는 외로움을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술자리가 항상 가득히 외연을 넓히며 사는 삶을 썩 반기지 않는다.


일상의 공간, 여행의 시간_박준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 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싫어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숨겨진 좋아하는 것도 함께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싫어하는 것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하면 이미 놓쳐버린 좋아하는 것들에 잔뜩 얽매여 후회하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이 싫다고 항상 새로운 여행만 가득한 삶을 선택한다면 일상이 주는 안정감은 사라진다. 그때부터 즐거웠던 여행은 불안정한 일상에 대한 걱정만 가득한 채 오롯이 즐기지 못한다. 일상의 공간이 있기에 여행의 시간이 즐겁고, 여행의 시간이 있기에 일상의 공간에서 버틸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20대 초반 끝이 보이는 일을 섣불리 판단하던 때가 있었다. 가능성을 보고 확실한 것에만 힘을 주고, 희미한 것들에는 힘을 잔뜩 빼며 살았다. 얻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던 확실한 것들은 결국 내 것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스물아홉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고 답한다. 안 될 거라면서 힘을 뺐던 희미한 것들이 오히려 더 큰 힘이 되었고 확실한 내 것이 되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굳이 달라지지 않아도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그 쓸모를 알게 될 것이다. 여행도 떠나보면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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