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10년 동안 생각해온 가족의 의미를 모두 담은 영화이다.
영화 <어느 가족> (2018)
누군가 무슨 영화 좋아해요?라고 물어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라고 대답할 정도로 이제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어느 가족>(2018)를 보고 나니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데뷔작 <환상의 빛>(1995)부터 이번 작품까지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하 고레에다)은 성실하고 꾸준하게 작품을 만들었다. 별다른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그의 영화를 보며 누군가는 지루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래서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레에다는 영화에서 유독 죽은 자와 아이가 중요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두 존재로부터 사회를 바깥에서 비평하는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통해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 아키라(야기라 유야)의 잊을 수 없는 슬픈 눈빛은 어쩌면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그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썼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라는 글에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가족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두고 있고, 아역들의 존재감이 뛰어난 그의 작품에서는 다른 영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1.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2. 소외된 시선을 주로 다룬다.
3. 악역이 없다.
4. 단지 몇 컷을 위해 소모되는 캐릭터가 없다.
영화 <어느 가족>은 기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 오히려 뺄셈의 법칙을 통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번 영화에서는 '나'와 '가족'을 잇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해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레에다의 작품을 챙겨본 사람이라면 '어? 저 사람!'이라고 외칠 정도로 익숙하게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이다. 릴리 프랭키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서민적이고 친구 같은 아버지인 '유다이'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꾸준히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이번 작품까지 어느덧 같이 호흡을 맞춘 네 번째 작품이다. 꽤 먼 길을 같이 걸어왔다.
영화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하츠에 할머니 역할을 두고 고레에다는 “처음부터 키키 키린을 생각하고 각본을 썼기 때문에 그녀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역할이다”라고 전할만큼 키키 키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두고 있다. 영화 <세 번째 살인>을 제외하고 고레에다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할 정도로 그가 걸어온 길에는 그녀도 나란히 걷고 있다.
어디서 이런 아이들을 데려왔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는 아역의 존재감이 어른 못지않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마에다 형제,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키라를 포함한 다섯 남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 그리고 영화 <어느 가족>에서의 쇼타(죠 카이리)와 유리(사사키 미유)까지 아이들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같이 등장하는 어른들의 존재감이 잊힐 정도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쇼타 역을 맡아 좀도둑질을 하는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점점 의문을 품는 연기를 펼치는 죠 카이리(쇼타 역), 상처받은 다섯 살 소녀 역할을 맡아 쓸쓸하고 애처롭지만 어린 소녀의 해맑은 모습까지 다양한 감정적 변화를 연기하는 사사키 미유(유리 역)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들의 작은 몸집과 떨리는 눈빛에서 전해오는 감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어질 정도로 그 여운이 진하게 다가온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류세이 집으로 두 가족들이 사이좋게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고레에다의 영화는 주로 뒷모습 또는 인물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영화가 끝이 나는데 마치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이 느낌은 우리가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약 2시간 동안 그들의 사는 모습을 잠시 훔쳐본 듯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의 연속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선택하지 못한다. 태어나는 순간 가족은 선택되고, 죽을 때까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함께 간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그들은 할머니의 연금이라는 '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느 가족'의 끈끈함과 신뢰가 돋보인다.
취약하다는 것은 곧 약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꽁꽁 숨긴다. 보이는 순간 손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취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가족'에서는 각기 다른 이유로 겪었던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보금자리를 다른 이들에게도 조금씩 내어준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으로 변해간다. 행복할 요소는 하나도 없는데 웃음꽃이 핀다. 이전 작품을 통해 주로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자발적으로 가족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들은 각자 어떤 상처로 기존의 가족을 떠났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서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상처가 조금씩 드러난다.
화목함만 느껴진 영화 <어느 가족>의 포스터는 영화를 관람하고 다시 보니 곳곳에 슬픔이 베여 있다. 과정은 해피엔딩일지라도 결과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였기에,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은 타이밍을 놓쳐 의도치 않게 깊게 우려진 홍차의 끝 맛처럼 씁쓸하게 다가온다. 경찰의 왜 버렸냐는 질문에 노부요는 주웠을 뿐,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경찰은 노부요를 심문하면서 쇼타와 유리가 뭐라고 불렀는지 묻는다. 엄마? 어머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도 어머니도 아니었다. 애초에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아차린 노부요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는다.
"늘 이렇게 한 발씩 늦는다니까"라고 말했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료타처럼 하츠에가 곧 죽을 것임을 깨닫고 가족들에게 속삭였던 고마웠다는 한 마디와 버스에서 오사무를 향해 아빠라고 부르던 쇼타의 한마디도 어느 가족에게도 닿지 못했다.
가족이란 본성이 아닌 역사다.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도, 어느 한순간에 완성되는 법이 없다. 매미가 알을 낳아 유충이 부화할 때까지는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름만 '가족'이 아닌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상처 가득한 유리를 안아주면서 때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며 알려주던 노부요의 따뜻함과 가르쳐 줄 것이 도둑질밖에 없었지만 잠시 동안 아빠가 되어준 오사무의 포근함은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을 훔쳤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