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스물 아홉에 쓰는 퇴사 일기
by 서용마 Sep 03. 2018

11. 퇴사 후 잃은 것과 얻은 것


 2018년 3월, 스물아홉에 퇴사했다. 작년부터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계속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미뤘다. 지금의 안정감이 나쁘지 않았고, 회사나 상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어딜 가나 이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선택은 늘 괴롭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매번 좋고 나쁨은 확실치 않고 약간 좋은 것, 약간 나쁜 것, 덜 좋은 것, 덜 나쁜 것 등 애매한 것투성이다. 퇴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만두어야 할 이유도 크게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다닐만한 이유도 없었다. 힘들 때쯤 한 번씩 마약 같은 월급을 주니 그냥 다녔고, 나가게 되면 그 월급만큼 못 버니까 그냥 있었다. 회사는 내 시간을 샀다. 월급은 내가 일을 잘하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라, 시간을 샀기 때문에 줬다. 지금은 내가 시간을 샀다. 회사처럼 지급할 돈이 없기 때문에 열정 페이로 나를 부려먹는다. 대신 늦게 일어나도, 일을 조금만 해도 모두 괜찮다.       


 흔히 회사에 다니면 시간을 잃고 돈을 얻는다고, 퇴사하면 돈을 잃고 시간을 얻는다고 말한다. 퇴사 전에 가장 많은 생각을 쏟아붓던 고민의 지점이기도 하다. 퇴사하면 돈을 못 벌고 계속 줄어들 텐데 버틸 수 있을까? 평생을 같이 살아온 내가 본 나는 통장 잔액이 줄기 전에, 스스로 불안해서 못 버틸 것이다. 잠들기 전 인터넷 쇼핑은 포기할 수 있어도, 생활비조차 감당이 안 되면 그건 무모한 도전이다. 덜컥 겁이 났다. 그냥저냥 다닐만한데, 참고 다닐까?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참아서 해결될 문제라면 그냥 꾹 참으면 된다. 그런데 고민은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온다. 다시 선택에 따른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고, 결과는 뻔하기에 또 참는다. 참고 참아 득도해서 이른바 성인이 된다면, 아마존 정글 같은 사회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비법이 되겠지만, 득도는커녕 화병만 생긴다. 스물아홉, 마침 서른이 되기 전 핑계 대기 좋은 나이였다. 무모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났다. 생활비가 부족해 불안할 줄 알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불안하지도,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이 재밌게 지내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고민한 거야?  


회사에 다니면서 퇴사 후에 어떻게 지내게 될지 막연하게 그려본 그림은 엉망이었다. 돈은 잃고 시간을 얻는 사실 외에는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퇴사 후의 삶을 마주하면서 발생한 문제는 전혀 의외인 것들이 많았다. 


퇴사 후 잃은 것  


 회사를 다니면서 만들어놓은 좋은 습관이 사라졌다. 


 퇴근 후에 독서를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술 마시러 가자는 회사 동료, 방전돼서 피곤한 내 몸뚱이, 예정에 없던 야근, 갑자기 떠오른 글감으로 폭풍 글쓰기까지 걸림돌이 많았다. 방해가 가장 적은 아침에 30분 정도 일찍 출근해 책을 읽었다. 1년 넘게 지속한 좋은 습관이었다. 덕분에 작년 대비 20~30권은 더 읽을 수 있었다. 


 주말에는 항상 늘어졌다. 하고 싶어도, 비루한 몸뚱이가 바닥에 찰싹 붙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누워서 처리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하려고 결심하면 애매한 시간이라 금세 포기한다. 해야 할 일이 있을 조조 영화를 봤다. 전날 늦게 때도 내일 조조를 봐야 해서 신경 쓰이고, 아침에도 혹시나 영화 시간이 지날까 봐 일어날 때쯤 긴장하게 된다. 대신 영화를 보고 스스로 하든지 자유를 줬다. 집에 가서 다시 잠을 자도 됐지만, 이왕 나온 김에 뭐라도 했고, 했던 것들은 뭐라도 됐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장착한 좋은 습관은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퇴사 후에는 굳이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고, 주말에 못 하는 일은 평일에 하면 됐다. 대안이 생기니 좋은 습관은 이별을 고했다. (어떻게 만든 습관인데….)


스몰 토크할 대상이 없다.  


 출근하자마자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 밖으로 끌려간다. 오전 업무 중에 잠시 지루해지면 회사 동료와 차 한잔을 마시고, 점심시간에 밥 먹고 커피를 마신다. 오후에도 졸릴 때쯤 차를 마시고, 야근할 때도 잠시 머리를 식힌다.  


이번에 성과급 얼마 나온대요? 
다음 달에 그 차장님 퇴사하신다면서요?


 회사에 대한 대부분의 소문은 업무 후 회식 자리보다 티타임 중에 급속도로 퍼진다. 월요일 아침에는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평일에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회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재밌게 대화했는지, 어떤 날은 업무보다 그런 대화가 더 많은 날도 있었다. 회사를 나오니 그런 대화가 귀하다. 현재 내가 처한 문제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들어준다 한들 같은 처지가 아니라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가끔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들과 만나면 2~3시간씩 이야기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렇지만 시간이 돈인 사람들이다 보니, 직장을 다닐 때처럼 맘껏 대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택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회사에서 선택의 권한이 가장 많은 사람은 사장이다. 모든 선택은 사장에게 보고되고, 최종 결정을 내린다. 퇴사하니 사장처럼 선택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사장은 회사에 대한 중요한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밥은 몇 시에 먹을지, 오늘은 어디에서 일해야 할지, 밤에는 몇 시에 자야 할지, 내가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상관없는데, 결정을 내리면 기분이 이상하다. 10시에 일어나는 나를 보고 이 시간에 일어나도 되는 건지, '나태해진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회사도 안 다니는데 이 시간에 일어나도 상관없지, 대신 늦게까지 일하면 되잖아'라는 생각도 들어 모든 선택이 갈팡질팡이다. 갑자기 초등학교 때 의미 없이 그렸던 방학 시간 계획표가 생각났다. 


이럴 때 필요한 거구나.. 



퇴사 후 얻은 것


늦잠

 처음 몇 달간은 괴로웠다. 직장인들 출근할 때 나도 카페로 출근해서 일하고, 칼퇴하는 맛을 느끼고 싶었는데, 문제는 칼퇴가 아니라 칼출근이었다. 퇴사 후 5개월 동안 7시에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다. 지금은 컨디션에 따라 아침 8시~10시 사이에 알아서 일어난다. 회사 다닐 때보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진 것 같다. 그 시간에 일어나도 하루는 길다. 


잠이 가장 큰 행복이다



업무 집중도 

 회사 다닐 때는 간단한 일도 며칠씩 걸리곤 했다. 상사가 갑자기 시킨 일, 다른 업체에서 오는 전화나 메일, 회사 동료와 티타임, 오늘 꼭 사야 하는 제품을 사느라 쇼핑몰을 들락날락하다보니 업무 집중도가 많이 저해된다. 하나의 업무를 오롯이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은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일하다 보면 2~3시간 동안 하나의 일에만 집중한다. 일이 몰릴 때는 긴급도와 중요도에 따라 긴급한 일부터 빨리 처리하고, 중요한 일은 나머지 시간을 오롯이 할애한다. 옆에 말 거는 사람도 없고, 메일은 미리 확인해도 업무가 끝나면 회신한다. 업무 집중도가 올라가면 굳이 많은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다. 늦잠 자도 되고, 일찍 퇴근해도 된다.


 퇴사 초반에는 생각보다 하는 일들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서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서 장기 프로젝트와 단기 프로젝트를 적절히 섞어서, 평소에 기한이 급한 단기 프로젝트에 집중하되, 그 일들이 마무리되면 장기 프로젝트를 하는 식으로 시간을 관리한다. 퇴사 후 얻은 것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것 중 하나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기 싫은 것도 해낼 수 있다.


 팀장이나 상사가 하기 싫은 일을 내게 넘기려고 하면 일정, 역량 등 온갖 변명을 대지만, 변명은 변명일 뿐이었다. 대부분 하기 싫은 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넘어온다. 그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그 일로 인해 이전에 하고 있던 일이 안되면 항상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불만은 회사(상사)를 향했다. 


 퇴사하고 나서는 꼭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렇지만 이 일들이 마무리되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확보되기에 기분 좋게 해낼 수 있다. 회사 다닐 때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하기 싫은 일이 넘어오면 아주 싫어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기 싫은 일은 그 문제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하기 싫은 일은 그 자체가 문제다. 지금은 하기 싫은 일들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계속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있지만 입가의 미소는 늘고 있다. 



회사 다닐 때 지금 밖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밖에 나가보니 그때 당시의 고민이 '무모한 고민'이었다. 지금의 삶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다시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넘어져본 경험이 있으니, 언제든지 다시 넘어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거 하나면 됐다. 만약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을 몇 년간 마주하면서 살았을까.    



keyword
magazine 스물 아홉에 쓰는 퇴사 일기
소속일상기록연구소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기록한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symuch@outlook.com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