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를 읽고
사람들이 은행에 맡겨놓은 돈을 한꺼번에 찾으러 오는 상황을 바로 뱅크런(Bankrun)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금융 위기에 처하거나 안 좋은 소문이 돌 때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껴 즉시 은행을 방문해 너도나도 맡겨놓은 돈을 인출하려고 한다. 신용도가 아무리 좋은 은행이라도 내일 당장 모든 고객이 맡겨놓은 돈을 찾아간다면 파산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래서 뱅크런은 은행이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 중 하나다.
막연하게 "고객이 맡겨놓은 돈을 그대로 돌려주기만 하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은행은 우리가 예금한 돈으로만 굴려서 먹고살지 않는다. 은행은 존재하지 않는 돈을 계속 빌려주면서 이익을 창출한다.
만약 은행이 고객이 맡겨놓은 예금 한도 내에서만 대출해준다면 돈이 필요한 고객(개인과 기업)은 새로운 고객이 돈을 맡기거나, 기존 대출 고객이 원금을 갚지 않는 한 즉시 빌리지 못한다. '대출 번호표'를 뽑고 은행에서 "빌려줄 돈 생겼으니 방문하세요" 할 때까지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시중에 돈이 원활하게 돌기 위한 정책으로 '지급준비제도'를 시행했다. 지급준비제도는 은행에서 고객이 맡긴 전체 예금액 중 일정 비율 이상으로 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 일정 비율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출로 다른 고객에게 빌려줘도 된다.)
대한민국의 법정 지급 준비율은 작년 2018년 기준으로 7%다. 만약 한국은행에서 1만 원을 은행 A를 통해 풀었다면 그 돈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계산해보자. 은행 A에게 돈을 빌린 고객은 집을 구입하거나,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 등의 이유로 다른 고객에게 돈을 쓴다. 물건을 치르고 돈을 얻은 다른 고객은 500원(5%)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고, 나머지 9,500원은 은행 B에 예금한다. 은행 B는 지급준비금 665원(7%)을 남겨두고 8,835원(93%)을 다른 고객에게 빌려준다. 은행은 이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돈을 증식시키면서 레버리지(차입투자) 비율을 약 8.5배까지 끌어올린다. 초기 금액이 1만 원이 아니라 1조였다면 무려 8.5조가 되는 셈이다.
요즘 잘 쓰지 않는 종이 통장의 첫 페이지를 펼쳐보면 "예금자보호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금보호공사는 평소에 금융회사로부터 보험료(예금 보험료)를 받아 기금(예금보험기금)을 조성한다. 만약 금융회사가 영업정지나 파산 등을 이유로 예금자에게 지급 불능 상태가 되면 예금보험공사가 금융회사를 대신하여 예금자에게 "최고 5천만 원"까지는 안전하게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우리(예금주)를 위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예금자보호법은 은행을 위한 제도다.
경제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변수가 다양한 미래 경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즉 '금융 위기'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금융 위기가 오면 돈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금융 위기가 온다는 소문만 돌더라도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서 집에 보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돈을 인출한다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신용도가 아무리 좋은 은행'일지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은행 A의 뱅크런은 은행 A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은행 B→은행 C→ 은행 … 등으로 계속 전염된다. 은행은 '없는 돈'을 끊임없이 증식시켜서 시중에 통화를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뱅크런이 발생할 경우 그 손실도 계속 증식시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정부는 은행이 가장 무서워하는 뱅크런을 예방하기 위해 "문제가 생기더라도 최대 5천만 원까지는 우리가 보장해줄게"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껴 돈을 인출하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예금자보호제도 덕분에 뱅크런 위험이 3배 이상 억제되었다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참고 기사)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은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시작으로 1997년 외환 위기 사태까지 돈에 대한 50대 사건을 다룬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어떻게 금융 중심지가 되었는지, 청나라는 산업혁명을 왜 일으키지 못했는지,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도 어떻게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살면서 한 번쯤 들었던 의문을 속 시원하게 파헤쳐준다. 홍춘욱 박사는 이 책을 쓰면서 과거 정부의 실패 사례를 볼 때 스페인이나 프랑스처럼 '경제학의 부재(한마디로 무식했다)'와 1990년 버블경제로 무너진 일본, 1929년 증시 대폭락을 겪었던 미국처럼 청산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달성할 목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칠 때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뱅크런과 관련해서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책 『메리 포핀스』 내용이 흥미롭다.
메리 포핀스를 유모로 고용한 뱅크스는 이름처럼 실제 은행가로, 도스 톰스 모슬리 그럽스 성실 투자 은행의 중역이다. 하루는 아이들을 자신의 직장인 은행에 데려갔는데, 회장 도스가 뱅크스의 아들 마이클에게 용돈 2펜스를 예금하라고 강권한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은행 밖에 있는 비둘기에게 줄 모이를 사고 싶었던 어린 마이클은 도스에게 "돌려주세요! 내 돈 돌려주세요!"라고 외쳤고, 은행에 있던 일부 고객들이 마이클의 외침을 듣고는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한다. 곧바로 다수의 예금자들이 똑같은 일을 벌이자, 은행은 예금 지불을 중단한다. 뱅크스는 당연히 해고되고 "인생의 전성기에 터무니없는 일이 터졌다."라며 한탄한다.
우리가 불안을 느낄 때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는 건 엄연히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한 권리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은행과 정부는 걷잡을 수 없는 치명타를 입는다.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을 읽으면서 영국부터 우리나라까지 얽힌 돈의 역사를 보며 느낀 점은 경제 정책을 펼칠 때 반드시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프랑스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수차례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은행과 지폐에 강한 불신을 가지게 만들었고 16세기 이후 프랑스가 콩라인(2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돈의 역사는 곧 신뢰의 역사다.
글 <독서의 취향>을 썼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싶지만 쉽지 않은 장르로 '경영/경제'와 '인문/사회/역사'를 뽑았다. 이 책은 경제와 역사의 콜라보다. 나 또한 설문에 답한 많은 사람들처럼 경영/경제,인문/사회/역사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이 책은 과거 역사에서 돈이 어떻게 작동되어왔는지 알기 위한 입문서의 역할로 충분하다. (물론 뒤로 갈수로 어렵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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