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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Oct 03. 2019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이제부터 나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미련 남는 일은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다


"옆 부서에 K팀장님 알지?"

"네. 그럼요. 기억나죠"


1년 6개월 만이었다. 전에 다니던 회사 과장님이 이직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만나 맥주를 마셨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매번 회식이 끝날 때면 함께 지하철을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작년에 퇴사를 했고, 과장님은 곧 다른 회사로 이직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대화 주제도 자연스레 '미래'로 향했다.


"나이 드니까 점점 노후 준비가 걱정이 되더라고. 팀장님들은 어떻게 노후 준비하고 계신가 궁금해서 K팀장과 커피 마시면서 물어봤거든. "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데요?"

"최근에 석사를 마치셨더라고"

"회사에서 지원해주신 건가요?"

"아니. 조용히 혼자 다니셨나 봐. 그런데 박사까지 도전하실 예정이래"

"그런데 노후랑 관련 없는 거 아니에요?"

"박사를 철학 쪽으로 생각 중이시더라고"

"철학이요?"


K팀장님은 물리학과 출신이었고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팀장을 맡고 있었다.


"요즘 AI가 유행이잖아. 앞으로 AI에도 감정이 필요할 테니 개발 경력과 철학을 접목시킬 건가 봐"

"와.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듣기만 해도 멋지네요!"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버린 K팀장님이 그렇게 진로를 결정한 건 요즘 트렌드라서 앞으로 전망이 좋아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새 디버깅을 하면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와서 가슴속에 묻어둔 그 꿈을 20년이 넘는 개발 경력 동안 수 천 번은 떠올렸을 것이다. 미련 남는 일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상념에 빠질 때마다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옆에서 뛰기 시작하면 걷고 있는 나도 덩달아 뛰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명에서 두 명, 세 명으로 늘어날 때마다 조바심은 극에 달한다. 결국 평소보다 무리하고 만다. 좋은 결과라도 나온다면 다행이겠지만 오버 페이스에 '좋은 결과'란 없다.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한병철 교수는 책 《피로사회》 에서 성과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대열에서 낙오하기 싫어서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말했다. 그 특징 때문에 자신한테든 타인한테든 계속 '할 수 있다'를 주입해야 하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쉽게 탈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9월에 발행했던 글 <마음도 퇴근하겠습니다>에서도 썼지만 퇴근하고 집에 와도 항상 뭔가 해야 할 거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내 속도에 맞춰 그나마 잘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퇴근 후 집에 도착할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같은 그 글을 발행하고 나서 한 달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리추얼은 어떤 것인가 하고.


"잠들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하는 행동이 뭐야?"

"퇴근 후 집에 오면 어떻게 쉬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습관 있어?"


답이 나오지 않을 땐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당장 해결할만한 정답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종종 단초가 되는 힌트를 얻을 순 있다. 그 힌트는 때론 다른 사람이었고 때론 책이었다. 이번에 발견한 힌트는 <메트로폴리스> 편집장으로 근무했던 메이슨 커리가 쓴 책 《리추얼》이었다.


나에겐 일상의 방해를 극복하고

나만의 시간을 지키는 리추얼이 있는가


약 45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 《리추얼》은 읽기 전에는 '리추얼이란 무엇인가', '가장 좋은 리추얼', '가장 나쁜 리추얼'과 같은 이론이 등장할 줄 알았다. 일단 '리추얼'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그렇게 다루면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작가 입장에서도 분량을 채우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메이슨 커리는 그런 설명을 달랑 서문 5페이지에만 할애했다. 그 외의 내용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161명의 인물의 삶을 통해 그들은 일상에서 창작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또 자신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소설가, 시인, 극작가, 화가, 철학자, 영화감독, 과학자 등으로 직업도 다양했다. 워낙 다양한 리추얼(또는 습관적 행위)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 내가 고민 중이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한 리추얼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찾았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얻은 건 있었다. 161명이나 되는 쟁쟁한 인물들 중에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어봤던 버나드 맬러머드가 1975년 인터뷰 때 했던 내용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한다.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나일뿐,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토머스 울프도 아닙니다. 글을 쓰려면 그냥 앉아서 쓰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에 맞는 방법을 택하면 됩니다. 어떤 작가가 철저히 시간을 지키며 작업한다고, 그 사람이 어떻게 작업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비결이 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소설을 쓰는 겁니다. 시간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결국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깨야할 진짜 미스터리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  버나드 맬러머드, 대니얼 스턴과의 인터뷰 중에서.


 무슨 일이든 나에게 맞는 속도로 가면 된다. 책을 느리게 읽는다고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빨리 읽는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다. K팀장님은 늦은 나이일지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길을 선택했다. 결과는 모를 일이다. 본인이 느끼기에 올바른 방향이면 된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나는 퇴근 후 멈추고 싶었지만 남들을 의식한 나머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내게 있어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가는 시간에 가까웠다. 단지 지금은 당장 '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어 무엇을 하든 하루가 마무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어 고민이었던 것뿐이었다. 일단 해야 할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맬러머드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제부터 나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부터 진짜 깨야할 미스터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




참고도서

책 《리추얼》, 메이슨 커리


Photo by Farrel Nob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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