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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Sep 29. 2019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다면

좋은 관찰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태도

의외로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도 캥거루가 그려져 있는 검은색 캉골 에코백을 들고 있는 분을 발견했습니다. 꼭 하루에 한 번 이상 20대 여성 분이 들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네요. 예전에 한 번 유행이 돌았던 것 같은데 다시 조짐이 보이는 걸까요? 정장을 입고 삼삼오오 출근하는 젊은 남자 무리를 보면 '광화문에 내리겠구나'라고 어림짐작을 합니다. 저는 광화문에 도착하기 전에 내리기 때문에 그들이 정말 그곳에 내리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거나 영상을 보는데 그중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집중해서 읽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계속 시선이 가다가 기어코 책 제목을 발견합니다. 중년 남성분이 책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읽고 계시네요. 그는 아마도 팀원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고민이 많은 팀장일 겁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혼자 펼치는 상상의 나래죠. 


일상에 귀 기울이면 의외로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지하철만큼이나 카페에서도 재밌는 일이 많습니다. 귀에 이어폰을 꼽았지만 어떤 특유의 목소리는 음악을 뚫고 제 귀에 쏙쏙 박힙니다.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닌데 듣다 보면 꽤 흥미로운 소재가 많습니다. 평일 낮에 판교의 어느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중고등학생쯤 되는 자녀를 둔 네 분의 어머니가 나눈 대화는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억납니다. 보통은 부동산이나 자식 교육 이야기하는지라 내용이 들려도 그냥 넘기는 편인데 그 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한 어머니가 불현듯 재밌는 일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립니다. 거실에서 날씨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방에서 공부 중인 아들이 화장실에 가다가 뉴스를 보며 했던 말이 너무 재밌더랍니다. 곧 태풍이 온다는 기상캐스터의 예보를 듣고 아들은 혼잣말로 '좋겠다. 태풍은 진로가 정해져 있어서'라고 말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뉴스를 보고 있던 어머니는 3초 뒤에 빵 터졌답니다. 살면서 자기 아들이 그렇게 창의적인지 몰랐답니다. 나머지 어머니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다들 웃음이 터졌습니다. (모르는 분들이지만 저도 옆에서 이 문장을 수집하면서 같이 웃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일상에 귀 기울이면 의외로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랑 일하면 엄청 피곤하겠구나'

책 <평소의 발견>을 쓴 유병욱 카피라이터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판교의 어느 북카페에서 진행된 북토크(후기)였습니다. TBWA KOREA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그 당시 첫 책을 출간한 지 몇 달 안 된 따끈따끈한 신인 작가였죠. 보통은 본인이 발표 자료를 만드는데 이 날은 카피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후배에게 맡겼더니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한 소리 하고 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봤을 땐 디자인, 폰트, 배치, 구성 등 너무 훌륭한데 말이죠. 유병욱 카피라이터의 성격이 대략 짐작이 갔습니다. '이 사람이랑 일하면 엄청 피곤하겠구나' 북토크에서는 그의 대표작이었던 의자 브랜드 시디즈(Sidiz)의 광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미디어에 송출된 최종본이 되기 전까지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더라고요. 최종본처럼 다를 게 없는 미완성작을 여러 번 보여주면서 달라진 점을 찾아보라는데 제가 봤을 땐 다 비슷해 보였습니다.



이번 책 <평소의 발견>을 읽을 때도, 2년 전 <생각의 기쁨> 북토크를 들을 때도 카피라이터는 우리랑 애초에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초부터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골라내는 센스가 있으니까 카피라이터가 된 거고, 그렇게 카피라이터가 됐으니 더 잘 보게 되는 거라고. 무엇부터가 시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둘은 순서와 상관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병욱 카피라이터는 이번 책에서 '평소의 힘'을 강조합니다. 전작에 이어 이번 책도 역시 술술 읽힙니다. 그는 카피를 쓸 때 책, 영화,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특히 익숙해서 평소에 생각 없이 흘려 넘기는 것에서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취향은 있지만, 싫은 건 없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왜 나는 관찰하지 못하는 걸까?


같은 것을 봐도 더 깊이 생각하고, 삶이 주는 기쁨을 더 깊숙이 좋은 관찰자가 되면 일상은 지금보다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관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감 있는 일상을 살아라

씻기 위해 욕조에 물을 채워본 적 있으신가요. 물을 틀어놓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 물이 언제 차나 싶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불현듯 생각나거나 물 넘치는 소리가 들릴 때가 되어서야 물이 많이 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종일 생각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요. 대신 무의식을 활용할 필요는 있습니다. 제약이 있다면 그 안에서 계속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영감이 떠오를 때도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 뇌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계속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어딘가에 바로 적어두는 것도 중요하겠죠.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하죠. 시간 내에 써야 할 글이 있다면 우리는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생각할 것이고, 답을 줄만한 주변 사람에게도 넌지시 물어볼 겁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압박을 느끼긴 하지만 그 압박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기한 없이 일을 진행했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났음을 알아차렸을 때 '지금까지 뭐했나?' 그 허탈함이란. 어쩌면 마감은 우리가 가장 쉽게 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입니다.


15일을 마감으로 정하는 순간 오늘부터 머릿 속 욕조에 '영감'이 채워질 겁니다.

그래서 좋은 관찰자가 되려면 저는 마감 있는 일상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여행이 즐거운 까닭은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표가 있기 때문이죠. 여행과 달리 일상은 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에 대신 돌아올 시간을 만들면 됩니다. 그건 '마감'이 되겠죠. 일상에서 여러 개의 망치를 들고 있다면 시선이 닿는 족족 못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 못은 생각의 재료가 되어줄 겁니다.


2. 취향은 있지만 싫은 건 없다는 태도를 가져라

취향이 분명한 사람은 좋고 싫음이 확실하지만, 저는 그 '싫음'이 경험에서 비롯되어야 좋은 관찰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경험하지 않고 싫다는 느낌만으로 멀리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내가 예상한 느낌대로 싫을 수도 있지만 막상 해보면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의외로'가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향은 있지만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에서) 싫은 건 없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믿기보다 경험을 믿으세요. 내가 직접 경험해도 좋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참고해도 좋습니다. 욕조에 받아놓은 물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뜨거우면 바로 발을 빼면 돼요.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고 '저건 엄청 뜨거울 거야. 안 들어가야지'라고 들어가기를 주저한다면 그 물은 한 톨도 사용되지 못하고 하수구로 향합니다. 어쩌면 오늘 하루 동안 쌓여있는 피로를 풀어줄 적당한 온도의 물이었을지도 모르죠.


책 <잡스 - 에디터>, 매거진B 편집부

책 <잡스 - 에디터>에서 미스터포터(Mr.Porter)의 편집장 제러미 랭미드는 에디터가 가져야 하는 태도로 "거의 모든 것에 '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에디터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왜 나는 관찰하지 못하는 걸까?라고 생각하기 전에, 랭미드가 말했던 것처럼 선 긋지 않는 태도가 먼저입니다. '저는 그런 거 안 해요' 미리 선 그을 필요 없습니다. 경험하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3.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관찰해라

Jean-Luc Godard and Anna Karina, 1960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물관에 가서 위대한 화가들이 자기를 사랑한 여자를 어떻게 그렸는지 보세요. 책을 읽어 작가들이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확인하시고요. 그런 다음 애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장 뤽 고다르가 했던 이 말을 듣고 인터뷰어 지승호는 책 <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에서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을 관찰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잘 관찰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라고 덧붙였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극장에서 재밌게 본 영화의 척도를 시계를 얼마나 봤는지에 따라 결정합니다. 정말 재밌었던 영화는 한 번도 보지 않거나 1~2번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루한 영화는 언제 끝나는지 10분 간격으로 시간을 체크하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고 있다면 시간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품을 남긴 화가나 작가들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있던 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좋은 관찰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무용지물이었겠죠.    


'메일에 적힌 오타는 딱 그만큼 당신이 중요하다는 뜻'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은 것에,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다.'
'인간관계는 인연이 아니라 의지이다.'
'전해지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책 <평소의 발견> , 유병욱


책 <평소의 발견>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적혀있는 카피와 같은 좋은 문장을 보면서 감탄하기 바빴습니다. 이 문장을 보며 누구나 공감하기는 쉽지만, 일상에서 저 문장을 누구나 발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어쩌면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이 사람과 일하면 엄청 피곤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가 남들보다 일상 가까이에 붙어있어서 남들은 쉽게 놓치는 디테일까지 챙기기 때문이었겠죠. 일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관찰력이죠.


우리 주변에는 새로움이 가득한 낯선 타지에서 조차 익숙함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익숙한 일상에서 매번 색다른 새로움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소'를 흘려보내지 않으면, '평소'를 만끽하다 보면 '평소'는 슬그머니 우리에게 반짝거리는 기쁨을 선사할 겁니다. 그때부터 평소의 발견이 시작됩니다. 자 그럼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 아닌, 일상으로부터의 여행을 떠나볼까요?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일상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하지만, 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우리의 인생은
― 책 《평소의 발견》, 유병욱


삶이 주는 기쁨을 더 깊숙이 누리는 좋은 관찰자들.



참고도서

책 <평소의 발견>, 유병욱

책 <잡스-에디터>, 매거진B 편집부

책 <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 지승호


그림

커버사진 - Edi Libedinsky

일러스트 - 스비 @sub.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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