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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현 Dec 11. 2018

나랑 할래

연애편지 #3


나랑 커피 한잔 할래?

커피 안 좋아하면 차도 좋아.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면 모과차도 있고 과일 주스도 있어. 별 이야기 안해도 괜찮아. 혹시 책 읽고 싶으면 읽어도 돼, 나는 글을 쓰면 되니까. 어색함을 무마하려고 시덥잖은 농담 안해도 돼. 모든 근황 모든 정보 다 안 알려줘도 돼. 한두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게 되겠어. 시간이 너무 늦었으면 맥주나 와인 마시러 가자. 뭐든 마시면서 같이 앉아 있자.


나랑 밥 먹을래?

밥 아니면 면도 괜찮아. 고기 먹어도 되고 해산물도 괜찮은데, 아, 나는 새우랑 매운 거만 아니면 돼. 그렇다고 하나도 못 먹는 건 아니고 너무 맵지만 않으면 돼. 불닭같은거나 엽떡같은거 빼고 말야. 파스타 그런 거 아니더라도 기사식당가서 찌개 나눠먹는 것도 좋아해. 그냥 든든하게 따뜻한 거 먹는 게 더 좋겠어. 배 많이 고팠으면 내 밥 덜어줄게. 많이 먹어.


나랑 걸을래?

요즘 날이 많이 추워서 한강은 못 가겠지만 공원 조금 걷자. 자전거를 탈 수도 없으니까 그냥 걷자. 차 있으면 편하겠지만 주차하느라 시간 많이 뺏길 것 같아. 그 시간 아쉽잖아. 걸음 맞춰서 천천히 걸으면서 너무 춥다 춥다,이야기하다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잖아. 저기까지만 걷자.


나랑 손 잡을래?

오늘 깜빡하고 장갑을 두고 왔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오기 직전에 책상위에 있는 걸 봤는데 그냥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냥 나왔어. 비 오는 날 일부러 우산 안들고 나오는 거랑 비슷해. 같이 쓰자고 하려고. 혹시 장갑 있으면 한짝만 줘. 혹시 너도 장갑 안들고 나왔으면 어쩔 수 없지, 손 잡아줘, 걷는데 손 시려워서 그래.


나랑 쇼핑할래?

스웨터 하나 새로 사고 싶거든. 집에 회색이랑 검은 색 스웨터가 있는데, 흰색 스웨터가 하나 갖고 싶어졌어. 내가 얼굴이 하얗잖아. 흰색 옷 입으면 더 예뻐보이거든. 근데 예뻐 보일 사람이 없어서 그동안 안 샀어. 혹시 분홍색 좋아하면 너도 한번 입어봐. 남자가 분홍색 잘 어울리면 웃는 게 되게 이뻐 보이거든. 잘 웃으면 잘 생겨보이는 거 알아? 잘 웃는 여자가 좋다고 했잖아. 나도 잘 웃는 남자가 이상형인데.


나랑 미술관 갈래?

이번에 뉴욕에 갔을 때 클림트 그림을 보고 반했었어. 그림은 역시 실제로 봐야 하더라구. 화집이랑 책에서 보는 거랑 너무 달라.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화가의 에너지가 느껴져. 가끔 내가 인상을 찌푸리기도 할거야. 그거 기분 안 좋은 거 아니고 질투가 나서 그래. 너무 그림이 좋으면 진지하게 속상하거든, 나도 잘 그리고 싶어서. 내가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거나 그러진 못할거야.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거든. 좋으면 좋은 거고 별로면 별로인 거지 뭐. 굳이 그게 어쩌고 저쩌고 감상 말해주지 않아도 돼. 미술 모르면 어때, 느린 산책 같은거야. 미술관 공기 되게 좋아. 조용하고 하얗고.


나랑 여행갈래?

수영하러 가도 좋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도 좋아. 다만 어디든 비행기를 타고 가자. 두시간이든 스무시간이든 상관없어. 따로 출발해서 공항에서 만나자. 이코노미 좁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소근소근 이야기 하자. 아마 비행기가 뜨면 나는 금방 잠들거야. 그러면 어깨 좀 빌려줄래? 목 베개보다 니 어깨가 더 듬직하잖아. 너도 내 얼굴에 얼굴 기대서 자. 그렇게 어디든 가자. 새벽에 떨어져서 허름한 숙소에서 대충 자도 괜찮아. 거기엔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무하고도 다른 약속 안 잡고, 매일 매시간 우리 둘이 약속할 수 있을거야. 아침부터 밤까지 당연하게 같이 놀 수 있잖아.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나랑 잘래?

보일러 틀 돈을 아끼느라 집이 조금 추워. 전기 장판도 없어서 침대도 좀 차가워. 나는 몸이 차서 한참을 이불속에서 웅크리고 있어야만 조금 따뜻해져. 하지만 손발이 계속 차거든. 야한 짓 하자는 거 아니고 그냥 같이 잠을 자자. 팔 베게 해주다가, 가끔 머리만 좀 쓰다듬어줘. 그러다가 발이 겹치면 이불 밖으로 빼지 말고 그대로 겹치고 있어줘. 팔이 저리면 빼도 돼. 그럼 내가 니 팔 꼭 끌어안고 잘게. 한쪽 어깨가 조금 아프겠지만 한쪽 팔로 너를 안는 게 좋으니까 참을 수 있어. 키스 안해도 되니까 볼만 맞대고 있어줘. 아마 심장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새벽내내 못자겠지만 나랑 같이 자자.


나랑 살래?

가끔 놀러오듯이 집에 와서 며칠씩 당연하게 안가도 괜찮아. 수건써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돼. 칫솔은 그냥 거기 계속 꽂아두면 되고. 헐렁한 잠옷도 하나 있어. 전 남자친구거 아니고 내가 가끔 입는거야. 캐나다에서 산건데 엄청 크더라구. 마침 너랑 잘 어울리는 체크무늬야. 내가 끓인 미역국이 좀 맛있는데,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고 사실 미역국은 좀 오래 끓이면 다 맛있거든. 니가 밥만 새로 좀 해줘. 햇반 먹지 말고 갓한 밥 퍼서 먹자. 혼자 먹으면 매번 밥이 남아서 버리는데 아까워서 그래. 밥하는 거 귀찮으면 치킨 시켜먹자. 티비 보면서 마늘치킨 먹자. 양념 묻었다고 놀리지 말고 닦아줘야 해. 마늘냄새나도 괜찮으니까 문득 뽀뽀하고 싶으면 해도 괜찮아. 같이 먹었으니까 나도 마늘냄새 날거야. 그러다가 소파에서 낮잠 자자. 밖에 눈이 오는지 달이 떴는지도 모르게 길게 자자.


나랑 사랑할래?

두 번 다시 진짜 사랑같은 거 안 할거라고, 못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하고 싶어졌어. 연애는 귀찮아, 사랑이 좋겠어. 나 혼자 하는 사랑말고, 둘이 하는 이별말고, 둘이 하는 사랑하자. 다른 사람들 하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랑말야. 노랫말에서 드라마에서 말하는 그런 엄청난 사랑도 별로야. 운명이고 영원이고 그런 게 어딨어. 사랑하는 거 이유도 없고 방법도 없다는 거 알잖아. 너도 그랬잖아,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서 울어봤잖아. 결국 또 똑같이 반복되고 또 울지도 몰라. 그럼 또 외롭겠지만, 더 슬프겠지만. 지금은 사랑할 수 있잖아. 결국 우린 사랑말고 하고 싶은 게 없잖아.


나랑 하자.

너랑 나랑 할 수 있는게 많겠지만 그거 말고 사랑하자.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걷고 이야기하고 여행하고. 그런 거 다 안해도 사랑만 하면 돼. 사랑만 하고 싶어. 사랑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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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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