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뭔가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
뭔가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야할 것들은 있는데 안한다. 사실 그게 꼭 해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어찌저찌 주어지는 것들만 하며 산다. 문제는 금새 에너지가 닳아버리거나, 사실은 재미가 없거나, 별 계획이나 생각없이 흘려보내다가 하루가 끝난다. 오늘도 광화문 교보문고를 멍한 눈으로 헤맸는데 보고싶은 책도 사고싶은 책도, 궁금한 문구류도 없고 사고싶은 것도 없었다. 마음이 허하면 찾아가던 광화문 교보였는데 사람과 물건에 뒤섞인 불안하고 정신없는 곳이 되었다. 수천 수만개의 물건과 가격표가 나를 사라!하고 소리없이 외치는- 온갖 물건들을 피해 후다닥 나와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그 어떤 욕망도 일지 않는다. 내가 갖고싶은 게 대체 뭔가. 내가 하고 싶은 건 뭐고.
어정쩡한 시간에 집에 돌아와서 뭐든 해야할 것 같았다. 일본 여행에서 찍은 동영상이나 편집 해볼까 하고 컴퓨터를 켰는데, 프리미어가 깔려있지 않았고 설치하려고 보니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해야했고 컴퓨터가 오래되서인지 온갖 자료들이 마구잡이로 저장되어서인지 설치가 안됐다. 업데이트를 하려면 애플 로그인을 해야했는데 비밀번호 설정을 다섯번 실패하고 나니 욕이 나오려고 해서 그냥 꺼버렸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옛날 영화를 보는데 영어공부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기결제를 해둔 프라임 무비팩이 아까워서 뭐라도 볼까 싶어 마약왕을 틀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만 뒤적였다. 흘러가는 인스타그램의 사진들과 트위터의 온갖 말들에 이어, 승리니 정준영이니 하는 것들로 가득한 뉴스들에 기분이 점점 나빠지길래, 내가 이걸 왜 보는 걸까? 하고 현타가 왔다. 요즘 내가 뭐하고 사는 걸까 싶다.
욕망하는 것이 점점 줄어간다고 생각이 들지만, 안다.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정말 정말 욕심쟁이라서 욕심내지 않는 게 아니라 요즘은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기대를 하기 싫은 것 같다. '생각하는 데로 살고 사는대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마음깊이 새겨두었던 여느때의 내가 있었는데 그래, 지금의 나는 분명 문제가 있다. 지금도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글도 쓰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고 책도 안 읽고 연애도 하지 않고.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돈이 되는 것도 즐거움을 주는 것도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 것 같은 허무.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수없이 해봤는데 그다지 대단한 결과를 내지 못한 결론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만 들여다 봤는데 어느새 열두시가 넘었길래 잠을 잤다. 딱 한시간 자고 눈이 떠졌다. 배가 고팠다. 지금 먹을 수는 없으니 아침에 먹으려면 밥을 해두어야 한다며 억지로 일어났다. 밥솥을 예약해두고 냉동실의 고기를 꺼냈다. 요즘 이상할 정도로 뭔가 사소한 문제가 생긴다. 갑자기 전자레인지가 고장이 나서 이 새벽에 음식을 미리 꺼내두어야 하고, 컴퓨터 업데이트, 비밀번호 오류, 버스 시간, 날파리, 상한 우유, 한시간의 잠.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것들. 별거 아닐수도 있지만 결국 그렇잖아. 쌓이고 쌓여서 기분도 일상도 엉망이 되는 건 사실인데.
새벽 세시가 넘어가니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문득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켰는데, 또 역시나 사소한 문제로 배터리가 문제였고- 지금도 글을 쓰는 중간 중간에 계속 로딩이 되며 사소하게 나를 괴롭히지만- 꿋꿋히 쓴다. 계획과 다짐을 써본다.
1. 매일 뭐든 쓰기. 여기에.
2. 몇시간을 자든 오전 9시에 일어나기.
3. 책을 읽자.
4. SNS에 흘릴 말들을 차라리 글로 길게 써.
5. 사람 그만 만나. 허무해.
6. 혼자임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혼자인 걸 즐겨.
7. 타인에게 기대말고 나에게 기대하자.
8. 운동.
9. 책상 앞에 앉자. 길게.
10. 예전에는 생각을 너무해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정신차려. 생각 좀 하고 살자.
그나저나 나는 이 글을 끝내고 다시 잠들 수 있을까? 당장 4시간 후에 일어날까? 다짐을 쓰자마자 바로 어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좀 자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요즘은 다 괜찮아, 그래도 돼, 그럴 수도 있어, 그런 위로가 유행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나는 그게 와닿지를 않는다.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싶다. 이대로는 살아도 살아있는게 아니야.
정말 최선을 다한 노력, 정말 해봤니 봉현아, 하고 나를 꾸짖는 이 새벽을 기점으로 뭔가 바뀌긴 할까?
아무 의미가 없다면 내가 의미를 만들면 된다.
2019 0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