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하게도 회사에는 주말 당직이 있다. 주말 하루 출근시간에 출근하고, 평일 당직 퇴근시간인 23시경 퇴근한다. 그러니까, 가끔 아침당직을 서야하는 부서에 배치되면 당직순번에 더하여 별도로 아침당직까지 순번이 돌아가는 것이다.
예전엔 그냥 365일을 순번제로 돌렸는데, 그러다보니 주말당직은 주말에 나와 약 14시간을 근무하는데 평일당직과 같게 한번으로 취급되는 문제가 있었다. 평일에 절반정도는 당직종료시각인 23시 이후까지도 일을 하니까 평일당직은 그냥 야근하는 날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리하여 몇 해전부터 당직표가 세분화되어 평일당직, 금요당직(평직과 큰 차이가 있음), 주말당직(압도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으로 나뉘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분화되어 돌아가면 어느 신기한 달에는, 이번주의 나처럼.. 화, 금, 일요일 3일이나 당직을 서는 기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당직이여 내게로 오라-같은 일이다.
주말 당직 때는 묘한 고요함이 있다. 야근 때와는 사뭇 다르다. 야근동안엔 마음의 갈등과 싸워야 한다. '오늘 야근을 해야할만큼 정말 급한가', '낮에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집에서 할 수는 없는가', '난 왜 유능하지 못한가' 등 자아비난의 점진적 발달과정을 실시간으로 느낀다. 그러나 당직은 별 수 없는 출근이다. 갈등없이 별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부득이하게 일할 수 있다. 당직 일거리는 랜덤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일거리가 적게 들어오는 주말 당직을 만난 날엔 그간 하고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것이다.
연수는 나의 당직 일정 관리자이다. 당직이 좀 빨리 돌아오면 신통하게 찾아낸다. 주말 일정이 있어서 그 전전주 주말 당직과 바꾸면 "왜 이렇게 빨리 주말 당직이 온거지!"하는 식이다. "연수야, 원래 이번달 말이었는데, 우리 놀러가서 미리 하는거지" 한다.
연수가 1학년 때 일이다. 정말 너무 일이 바빠서 온가족이 일요일마다 날 따라 출근을 했다. 그 일이 몇개월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너무 기뻐서 금-토 숙소를 잡았다. 실은 팀장님의 너그러움 덕에 우리 팀은 하루, 혹은 이틀 정도(.....) 평일 휴가를 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난 아직 별 일정을 잡지 못해서 우선 금요일 퇴근 후 놀면서 평일을 낀 휴가계획을 세워볼 요량이었다.
산도 바다도 아니고 수도권에 있는 그냥 숙소였는데도 놀러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연수는 신이 났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불길한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그는 우리팀의 수석이었던 분으로, 일이 극한으로 치달아갈 때 맹장이 터진걸 모르고 일하다가 다른 팀원들에 의해 강제로 택시에 태워져 후송된 인물이었다. 연수는 그를 맹장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수석답게 팀장님의 너그러움을 제일 먼저 활용하여 돌아오는 월요일이 휴가인 자이다.
"여보세요"
"어....봉이모야..내가 실은 지금 동남아인데.. ."
"오~ 혹시 너무 좋아서 전화하신거?"
"....나 오늘 당직이야."
"뭐?토요일? 오늘?"
"응."
"안바꿨어?"
".....응. 몰랐어. 혹시 오늘 당직 좀..."
"뭐어?"
"욕해도 되긴 하는데..이미 아내한테 너무 많이 들어서 하려면 조금만 하면 좋고..."
옆에서 대화를 다 듣던 연수가 '잠깐 잠깐'한다.
"엄마, 당직 3번이랑 바꾸자"
"응?"
"아니다, 아니다, 여행 중인걸 감안해서..."주말"당직 3번이랑 바꾸자 그래"
"오......오케이!"
"수석님"
"으응?"
"여행 중 그와같은 변수를 맞이하여 얼마나 근심이 크시옵니까. 제가 금일 회사에 가있어 볼테니 그저 주말당직 3일을 서주시면 되옵니다."
"세...세번? 아알겠다, 세번 서야지, 주말 세번 서야지"
"지금 회사로 가옵니다"
그 날은 다행히 할만한 당직이었다.
아이들도 아빠와 회사근처 키즈카페에 있다 와서 별 불만은 없었다.
맹장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필 내 다음 주말 당직이 1월 설날이었다. 연휴 한복판 당직표를 들고 맹장아저씨께 당당히 가서 당직 교체 도장을 받아왔다.
특별히 세번의 주말 당직을 한방에 퉁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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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아저씨도 그다지 불만이 없어보이는 표정이었는데...그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