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방을 탐험하다
몇 가지 물건을 비워내고 나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비워낸 자리가 생겨났고, 그 자리를 채우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으니 방에 들어선 걸음에 숨통이 트였다. 여전히 가득 찬 듯 보이는 방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작은 여백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여유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여백이 아니라, 그동안 물건들에 가려져 있던 나만의 시간과 마음의 공간인 것 같았다.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움의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물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필요해 보였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모든 것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비워내는 데 급급했지만, 점차 ‘진짜 필요한 것’과 ‘단지 가지고 싶은 것’ 사이의 경계를 조금씩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옷장을 열어보았다. 언제나 꽉 찬 옷들 속에서 옷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던 그 옷장이었다. 계절마다 바뀌는 유행을 좇아 구매했던 옷들, 언젠가 입을 것이라며 사두었지만 결국 입지 않은 채 그대로 걸려 있던 옷들. 한 벌 한 벌 꺼내 볼 때마다 그 옷을 샀던 이유와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결혼식 참석을 위해 샀던 불편하고 예쁜 원피스,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 면접을 앞두고 다부지게 구입했던 정장, 여행을 떠나며 들뜬 마음에 샀던 화려한 티셔츠. 옷들은 그 자리에 존재해야만 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고, 그래서 쉽게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중 많은 옷들이 현재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결심했다. 옷을 하나씩 꺼내어 입어보고, 그 옷이 지금의 나에게 어울리는지를 판단하기로. 예전의 나를 떠올리며 구입했던 옷들은, 그때의 감정과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지만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비로소 그 옷들을 비울 준비가 되었다. 나는 옷을 접어 작은 상자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무겁지 않게, 아쉽지 않게, 추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천천히 정리했다. 그렇게 옷장 속 공간이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고, 남은 옷들 사이사이 공간이 드러나며 옷의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주 입고 좋아하는 옷들이 주로 남아 있었다. 이제야 내 옷장이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옷장을 한 번에 모두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일부를 남겨둔 채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전에 비웠던 책들 외에도 여전히 많은 책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책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 책들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일까?’ 책은 지식의 저장고이자, 갖고 싶은 모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책장에 꽂혀 있을 뿐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소유함으로써 책 속의 지식까지 내 것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부끄러운 감정이 일었다. 나는 그 책들을 하나씩 꺼내어 제목과 목차를 훑어보았다. 읽고 싶다는 마음에 샀지만, 막상 집에 와서는 다른 일에 치여 읽지 못한 책들, 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샀지만 정작 내게는 흥미를 끌지 못한 책들. 나는 과감하게 그 책들을 책장에서 빼내어 쌓아 보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책장을 채워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 충동을 억누르고, 내게 정말 중요한 책들만 남겨두기로 했다. 쌓아둔 책의 절반 이상은 읽지도 않은 새 책이어서 속이 쓰렸다. 책장의 비워진 공간을 바라보니 어떤 책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이제는 그곳에 공기와 빛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빈 공간은 더 이상 텅 비어 있지 않았다. 빈 곳을 애써 채우지 않아도 설렘으로 충만했다. 방 안의 작은 변화들이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고 있는 중이다. 비우면 비울수록, 오히려 나 자신이 더욱 명확해진다는 것.
나는 비우는 것이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진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비우면서 나는 비로소 내 방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텅 빈 듯 보이는 방에서 나는 가득 찬 마음을 느꼈다. 더 이상 채우지 않아도 이미 나는 충분히 충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비움으로 나의 공간을 다시 채워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