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비워내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동안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비워지자, 그 자리에 나도 모르게 쌓여 있던 '마음의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물건들은 분명 비웠지만, 나의 감정이나 기억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마치 물건들이 사라진 자리를 찾아온 먼지처럼, 비워낸 공간 속에는 가볍게 툭툭 털어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물건들 속에 감춰두었던 나의 감정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책장 위에 있던 잡동사니 상자를 꺼내보았다. 작은 상자 안에는 각종 영수증, 오래된 명함, 이벤트에서 받은 기념품, 그리고 잊고 지냈던 작은 편지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손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몇 년 전 다녀온 전시회의 티켓, 오래된 친구와 함께 갔던 공연의 티켓, 낙서나 메시지가 적힌 메모지. 그때마다 잠시 미소 짓게도 하고, 한숨 짓게도 하는 기억들이 스쳐갔다. 그런데도 이 작은 물건들을 다시 보니 더 이상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저 아까운 마음에, 혹은 잊지 않으려고 쌓아두었던 것들이었다.
한 번 더 후~하고 불어보자. 먼지와 함께 나의 오래된 감정들도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손에 든 메모들을 하나씩 읽어보며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오래전 받았던 친구의 감사 편지는, 그때의 따스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서로 연락이 끊긴 친구의 것이었다. 그 기억은 소중했지만, 이젠 그때의 감정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쉬운 감정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편지를 사진으로 남긴 뒤 정리했다.
그다음은 회사 생활의 흔적들이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기록이 담긴 업무 노트, 그리고 동료들과 주고받은 장난스러운 낙서들이 상자 안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 물건들을 버리기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노력했던 시간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건들이 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내가 살아온 과정의 일부일 뿐,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나의 가치는 물건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패와 인증서가 없더라도, 나는 내가 그때의 나로서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참을 상자와 씨름하다 보니, 손끝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자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나니, 비로소 상자 안의 물건들도 가벼워졌다. 물건을 비우고, 그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나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비로소 물건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추억으로만 기억할 수 있는 준비가 된 듯했다.
가벼워진 공간은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물건들에 가려 보지 못했던 나의 진짜 마음을 마주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물건들 속에,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기억 속에 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나의 진짜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물건들 속으로 숨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비움이 주는 여유 속에서, 나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먼지 속에 가려져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털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일. 그것이 진정한 비움이 아닐까 싶었다.
비워진 상자와 방 안의 공간들은 이제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텅 빈 것이 아니라, 가득 찬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나는 그 거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움은 나에게 물건의 무게를 덜어내고, 마음의 무게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더 이상 물건이 아닌, 내 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비워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가볍고도 충만한 나를 발견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