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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인희 Oct 18. 2024

기억 속 먼지 털기

사진을 보다가


물건을 버리거나 나누기로 결정하는 건 선택과 결정을 괴로워하는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다. 단순히 공간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얽힌 기억과 감정까지 떠나보내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비움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물건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손에 들린 물건들은 때로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지만,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을 떠올리게도 했다. 나는 물건들과 함께 혼란한 감정들도 하나씩 정리하고 싶었다.


방안의 리빙박스를 정리하다 깊은 바닥면에 다다랐을 때 손에 들린 것은 오래된 낱장의 사진들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의 순간들, 교복을 입고 찍은 각자의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서로 마주하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어설픈 표정과 어색한 자세로 찍한 사진을 보며 서로를 놀리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사진 속 나의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친구들과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있었다. 시간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만들었고, 각자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때처럼 가깝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넘겨보며 옛 친구들과의 추억이 나를 얼마나 웃게 했는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 시간들이 나의 어떤 일부가 되었는지도. 

추억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인화한 사진의 모습으로 보관하는 대신, 자주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 꺼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들을 바닥에 펼쳐두고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오랜 사진들을 버리며 나는 그 시절의 친구들과 쌓았던 추억들을 물건으로 가득한 박스 바닥이 아닌 늘 소지하는 핸드폰 안에서 발견하고 자주 마주하길 바라게 되었다. 어쩌면 사진 중 일부는 친구인 누군가에게 반가운 소식과 함께 문자나 카톡으로 전해질 것이었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물건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우리가 그 안에 기억을 담아둘 때 비로소 특별해진다는 것을. 그러나 모든 기억을 물건에 의존해 붙잡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물건을 정리한 뒤의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빈자리가 있어야 비로소 새로운 추억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오래된 사진을 버리는 행동은 기억 속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진정한 추억을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내 삶에 어떤 가치를 만들어주었는지 되새기며 인정하는 일이다. 물건을 떠나보내는 것이 기억과 감정을 함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그리고 더 소중히 간직하는 의외의 방법임을 깨달아간다.


그렇게 나는 하나씩 물건들을 떠나보내며 나의 기억을 정리한다. 때로는 비움이 가져오는 상실이 낯설고 두렵지만 오히려 전에 없이 진중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생기곤 한다. 비움이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추억이 자리했던 빈자리는 이제 새로운 가능성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기억 속의 먼지를 후후 불고 탈탈 털어내며 스스로와 더 깊은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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