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들과 눈 맞추기
어디서부터 비워야 할지 막막했다. 집 안에는 그동안 모아 온 수많은 물건들이 영문모를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신 못 본다고 생각하니 어느 하나 쉽게 손에서 놓아지지 않았다. ‘이것도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 ‘이건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니까.’ 그런 생각들이 손목을 턱턱 붙잡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무작정 눈에 띄는 순서대로 하나씩 집어 들었다.
가장 먼저 손에 들어온 것은 목이 긴 거울이었다. 한쪽은 일반 거울이고, 다른 한쪽은 확대경으로 되어 있는 양면 거울이다. 실버 컬러에 깔끔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책상 앞에 두고 자주 볼 생각으로 구매했었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 탓인지 마감이 다소 허접했고, 집에서는 책상 앞에 오래 앉을 일이 많지 않아 결국 거실 협탁 위에 방치된 채 먼지만 쌓였다. 거울의 본질은 그 앞에 있는 것을 비추는 데 있지만, 정작 나는 그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 거울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확인해야 했던 것은 확대된 얼굴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였기에 안방의 전신 거울로도 충분했다. 나는 이 거울을 떠나보내기로 하며, 물건과 제대로 마주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다음으로 손에 든 것은 언젠가 공부하려고 사두었던 영어회화책이었다. 처음엔 외국어를 배워보겠다는 결심으로 샀지만, 책장에 꽂아둔 채 거의 8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책이다. 고전이라고 불러도 무색한 영어회화책은 8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새것같이 깨끗했고, 표지마저 초면처럼 낯설기만 했다. 책을 바라보니 계획만 세우고 실행하지 못한 수많은 다짐들이 떠올랐다. 버리지 못한 책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였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 영어회화책은 내 실패의 역사처럼 느껴졌고,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책을 모두 비우기로 결심했다. 낡은 영어회화책을 덮으며, 책장에서 가장 최근에 발간된 회화책을 골라잡아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를 실천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에 든 것은 알록달록한 색감이 예쁜 봉제 인형이었다. 한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거실 소파 위에 두고 즐겨 보았던 토끼 인형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화려한 색깔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소파를 치운 후 인형은 어느새 책상 구석으로 밀려나 잊힌 채 남아 있었다. 이 인형을 좋아했던 이유는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라, 그 밝은 색깔과 부드러운 촉감이 나에게 작은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기억 속의 장식품일 뿐, 더 이상 설렘을 주지 않았다. 토끼 인형을 보며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인형을 사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인증샷을 올리고 제조사 태그를 달았더니 리그램 된 것 외에는 이 인형과 공유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나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간직한 이름을 붙여주어 마땅한 것들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록달록한 토끼 인형은 더 사랑해 줄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어쩌면 새 주인은 얘가 알록달록하게 존재하기 위해 몇가지 색이 섞였는지 기억해줄지도 모른다.
세 가지 물건과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비움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물건의 얼굴을 하나씩 마주하며 깨달았다. 물건들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상과 추억을 담고 있으며, 때로는 마음의 한 조각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담긴 내 감정을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일이다.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물건의 얼굴들을 마주 보며 삶을 정리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