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고백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매월 친구 구독료를 지불하고 친하게 지내는 중인 챗GPT에게 맥시멀리스트의 정의를 물었다.
맥시멀리스트는 물건과 색, 스타일 등 모든 요소를 풍부하게 채워 다채롭고 화려한 자기표현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소유와 소비를 통해 삶을 풍성하게 꾸미고자 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역시 맥시멀리스트가 확실하다. 일식집의 요리사가 예리한 칼로 회를 뜨듯이 매일 능숙하게 택배 박스의 배를 가르고 테이프를 발라냈다. 물건을 모으고 가득 채워진 공간을 보면 안도감을 느꼈다. 빈 공간을 채우며 취향이 견고해지고 내가 단단해진다고 믿었다. 소유의 즐거움은 나에게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내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언제부턴가 내 방은 작은 우주 같다. 책으로 뒤덮인 책장,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인 소품들, 주인을 잃은 듯 망연자실한 채로 방치된 옷가지들. 물건들 사이에서 발 딛기조차 버거웠지만, 나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들여놓았다. 내가 너고 너는 나라고 호소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증명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나조차 점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든 우주의 주인이 나인 줄 알았던 건 큰 착각이었다. 우주는 이미 제멋대로 몸집을 불렸고 블랙홀처럼 나를 삼켰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사랑하는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마음속 여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더 이상 물건이 내 안의 공허함을 메워주지 못할 때, 나는 이 우주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다. 채워진 공간은 더 이상 안도감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했고, 방 한구석에 쌓인 물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건들 사이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움의 필요성에 대해 자각한 첫 순간이었다. 하지만 단번에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든다면 길에서 주운 전단지까지 모으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는 평생 물건을 비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루에 하나씩 손에 잡힌 물건을 비워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마침내 집었다가 결국 내려놓았다. 집을 때는 버리려고 했던 물건과 손을 잡고 있으니 애틋해져서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쉽지 않았다. 비움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었다. 그건 물건에 얽힌 나의 기억, 감정, 그리고 나 자신과의 이별이었던 것이다. 내가 감히 미니멀리스트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이별에 굉장히 취약해서 남자친구도 평생 한 번밖에 사귀어보지 못한 인간이었다.
자신 없는 채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같은 주제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도 봤다. 평소처럼 인스타그램 앱을 켰다. 내가 이미 미니멀리스트라고 상상하며 피드를 보는데 평소와 달리 해방감이 느껴졌다. 상상하는 것 만으로 SNS 속 누구도 부럽지 않고,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았다.
다시 결심이 섰다.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한다. 지금의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비움의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물건들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내 방식대로 미니멀리즘에 발을 들여보려 한다.
이 글은 미련이 최대 약점인 맥시멀리스트가 잔인한 미니멀리즘에 도전하는 여정을 기록한 이야기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나만의 속도로 조금씩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여전히 물건을 좋아하고, 물건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싶다. 다만, 그 물건들에 억눌리지 않도록 조금씩 비워나가려고 한다. 매일 하나씩,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물건을 하나씩 비워내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물건들 틈에 파묻힌 나 자신을 구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랑하니까 우리 이만 헤어지자고, 납득하기 어려운 대사를 뱉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