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5일 금요일 편집자의 일기
내가 태어난 집안은 종교가 없다. 친할머니는 필요에 따라 절에 가기도 했고 교회에 가기도 했고 또 어쩔 땐 무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신에 대한 믿음, ‘신앙’도 요샛말로 ‘덕심’의 일종일 텐데 내 가족들은 대체로 무언가에 확 빠져드는 성격이 못 된다. 진득하게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하달까. 유일하게 김 씨 성을 지닌 사람이라 그런가, 가끔 엄마를 보면 엄마는 예외적으로 신앙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매년, 명절과 기일마다 묘를 찾을 때를 보면 말이다.
엄마, 김미정은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잃었고 어머니로부턴 심한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가 결혼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고, 김미정은 줄곧 말한다. 그는 자매들과 같이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남쪽에 있는 무덤을 찾아간다. 그때 김미정은 어딘가 들떠 있다.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인데도, 그에게 그날은 중요한 날이다.
어머니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결혼생활에서 김미정은 시부모를 모신다. 시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이후 시어머니도 김미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 명이 거실에 나오면 다른 한 명은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김미정의 남편에게 딸린 형제들은 자신의 부모를 모시는 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훈수만 둘 뿐. 시아버지가 병상에서 돌아가시고, 이후 시어머니도 고관절 골절로 큰 수술을 받다 돌아가셨다. 이들의 삶과 병환과 죽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김미정이다. 이들이 함께 묻힌 무덤의 조화는 항상 그가 교체한다. 그는 그 무덤에서 항상 시부모를 향해 말을 건넨다. 작고 짧게 울기도 한다. 나도 한 때 교회를 다녀봤지만 신에게 기도할 때도 그렇게 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미정에게 친정어머니와 시부모는 신앙의 대상이고, 무덤은 신전이다.
6·25 전쟁 때 죽은 박정래 일병의 유해가 발견됐다. 1960년의 일이다. 그의 유해는 군산시 합동묘역에 묻혔고 유가족은 55년간 묘를 찾았다. 노모는 55년간 그 묘가 곧 아들이라 생각했다. 그런 줄로 알고 노모도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2015년이 돼서 국방부는 박 일병의 진짜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전했다. 유전자 감식을 해보니 국방부가 찾은 유해가 박 일병의 유해였다. 군산에 안장된 유해는 박 일병이 아닌 것이다. 노모가 죽기 전까지 아들이라고 여겼던 그 묘가 실은 일면식 없는 남이었다. 유해는 하나인데 묘지는 두 개인 상황.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경위도 알 수 없고 합장도 여의치 않다.
[1유해, 2개 된 무덤… 호국영웅 넋 운다]
헤드라인에 담고 싶은 내용이 더 많았지만 여기서 멈췄다. 문제는 메인사진 설명이었다. 인과관계가 복잡해 한두 줄로 사진 내용을 담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사진설명이 확정되는가 싶었다. 사진부장이 ‘오른쪽 사진은 유족이 박 씨로 알았던 1960년에 조성된 군산 군경합동묘역의 묘’ 부분에서 ‘박 씨로 알았던’이 문제된다고 했다. ‘박 씨의 것으로 알았던’이라고 수정해야 한단 것이다. 나는 ‘박 씨로 알았던 묘’라는 문장에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묘’는 물건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고 터도 아니다. 묘는 그 안에 묻힌 사람, 바로 그 자체니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그 어떤 신보다 더 무릎 꿇게 하는 신앙이 될 수도 있으니까. 사진설명은 수정되지 않고 원래대로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