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2일 화요일 편집자의 일기
스무 살 청년 때 강제 징용돼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서 원폭 피해를 당해 죽거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자녀들에게 병(病)을 물려준 아버지들이 있다. 누군가의 2세라는 호칭이 병명(病名)처럼 불린다. 일흔 살이 넘은 그 2세들이 아버지가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그 길을 따라나섰다. 평택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소집돼 부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평택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냥 기차도 아닌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구겨져 실려 내려갔다. 아들들은 각자의 아버지가 지었을 표정과 내뱉었을 말을 생각하며 그 길을 따랐다.
‘닦아주지 못한 눈물, 원폭피해자의 악몽’이 연중기획이라 이미 몇 차례 이런 주제의 기사가 1면에 실렸다. 그때마다 제목 지을 때 여간 힘든 게 아녔다. 어떻게 하면 1면을 스치듯 보고 말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멈칫, 할 수 있을까. ‘멈칫’하기만 한다면 제목은 그 역할을 다 한 것일 텐데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다.
[아버지 日 끌려간 길 따라 / 일흔살 아들도 섧게 울었다]
비슷한 느낌의 제목을 몇 번 고쳐 쓴 끝에 위의 제목이 나왔다. 그런데 대체 내 단어 사전 어디서 ‘섧게’라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의아했다. 이 낯선 단어를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목에 ‘섧게’만 너무 툭 튀어나와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제목을 수정했다.
[아버지 日 끌려간 길에서 / 일흔살 아들도 따라 울었다]
지면에 ‘섧게’ 대신 ‘따라’로 고쳐 쓴 제목을 앉혔다. 그냥 ‘따라 울었다’로 쓰고 말기엔 ‘일흔살 아들’들의 눈물엔 다른 성분이 포함돼 있을 것 같았다. 눈물은 흘리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그 염도부터가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눈물은 나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모든 눈물이 깊은 감정적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눈물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확실히 눈물은 우리가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희미한 생각과 감정의 모호한 영역에 속해 있다. 눈물은 어렴풋한 우울, 겉으로 분명히 표현되지 않는 기분들, 끊임없는 불만, 감춰진 질병, 통제를 넘어선 본능들과 한통속이다. 그러나 눈물은 우리 내면의 삶이 지닌 모호한 부분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한 가지 일을 한다. 바로 우리 눈에서 새어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눈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눈물은 목격자들이다. - 제임스 엘킨스, <그림과 눈물> 77p
‘섧게 울었다’ 처음 제목이 그대로 데스크를 통과했다. 이후 취재부서에서 몇 차례 ‘섧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 자주 쓰는 말인지, 제목으로 써도 되는 건지 질문이 들어왔으나 크게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아들의 뺨을 타고 흐르며 그들의 슬픔을 목격한 눈물을 말하기 위해 ‘섧게’라는 말이 아니면 안 됐다.
퇴근하고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섧다’는 말을 어디서 얻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좋아하는 시가 나온다. 시에서 얻게 된 단어라 더 기뻤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女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