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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Jul 02. 2021

쌀밥 같은 말

2021년 7월 2일 금요일 편집자의 일기

현 경기도지사가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경기지역 일간지에서 1면 톱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기사다. 편집회의를 기다릴 것도 없이 1면 톱이 정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사 초안을 먼저 읽어보며 제목을 구상했다. 


출마 선언문을 토대로 대선에 출마하는 이재명의 자세, 포부 등을 풀어 쓴 기사다. 단어가 많았다. 불공정, 불평등, 공평한 기회, 합당한 보상, 특권, 반칙, 청년, 절망, 고통, 양극화, 빈곤, 자원배분, 성장, 분노, 좌절, 기본권, 약속, 희망, 억강부약, 대동세상…. 무거운 단어들의 나열.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닌 단어들이 한 데 모여있으니 글이 무거워서 잘 읽히지가 않았다. 전부 제목으로 쓸 만큼 거대한 단어들이지만 그래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제목으로 쓰고 싶은 문장은 따로 있었다. 이재명의 출마 슬로건인 ‘이재명은 합니다’였다. 이 슬로건은 간단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문장이다. ‘이재명은 ( )합니다’ 괄호 안에 그가 앞으로 할 일, 해야 할 일, 국민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담아내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억강부약 대동세상처럼 위에 나열한 저 무거운 단어들 역시 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기사를 프린트한 종이 위에 ‘이재명은 (  ) 합니다’를 적어봤다. 그런데 이 슬로건과 함께 기사를 읽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아무것도 읽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단어들과 무거운 문장들로 채워진 글이 아무 내용이 없는 것 같았다. ‘이재명은 (  ) 합니다’라는 슬로건 속 괄호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


얼마 전에 회사 구내식당 조리사님이 그만두셨다. 하루 두 번씩 100인분 가량을 준비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을 혼자서 하셨다. 회사에서 직접 고용한 게 아니고 하청업체를 통해 오는 분이라 더 인력을 늘리기 어렵다고 했다.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사람들이 배식하는 동안 설거지를 하고, 국을 뜨고, 수저와 식판이 떨어지면 채우고, 다시 치우고, 반찬이 떨어지면 다시 퍼서 나르고, 이런 일들을 혼자서 했다. 그가 일을 그만두는 날 음료를 하나 사서 드렸다. 그동안 식사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설거지를 손에 놓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밥 잘 먹어줘서 고마워요.” 짧은 말이었지만 모든 게 다 담긴, 밥공기에 성기지 않게 가득 담긴 쌀밥 같은 말이었다.   


[대선열차 탄 이재명 “억강부약… 대동세상 열겠다”] 


헤드라인을 뽑기 위해 그가 뱉은 무거운 단어들을 골똘히 쳐다봤다. 그 단어들을  ‘이재명은 합니다’ 사이에 넣어보며 어떤 말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결국 그 단어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말, 그가 즐겨 쓰는 사자성어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이토록 거대한 포부를 담은 헤드라인은 어떤 말 한마디를 이기지 못했다. 갓 지은 밥 냄새가 나는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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