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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Jul 21. 2021

여기,

2021년 7월 19일 월요일 편집자의 일기

“집” 

하고 입으로 이 단어를 소리 내 말하면 매우 단단한 느낌이 든다. ‘ㅂ’ 받침은 주춧돌 같고, 모음 ‘ㅣ’는 기둥 같고, 자음 ‘ㅈ’은 지붕 같다. 그래, 집이라면 마땅히 빗물이 고이지 않게 해 줄 단단한 주춧돌, 튼튼한 기둥, 뙤약볕과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구조만 있다고 해서 집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기초마저 없으면 그건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최소 요건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먼 타국에서 일을 얻기 위해 한국에 온 노동자는 이런 구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비닐하우스를 ‘집’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를 강요받는다. 월세랍시고 월급에서 30만원씩을 꼬박꼬박 제한다. 작년 겨울 포천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가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딱 반년이 흘러 이제 숨 쉬기 힘든 폭염이 찾아왔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하나 달라진 게 있긴 하다. 포천 사망 사고 이후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자 농장주들이 외부인 출입을 감시하러 이주노동자 숙소에 CCTV를 달았다는 것이 달라졌다.


오늘 1면 톱기사는 [이주노동자 ‘집 아닌 집’에 산다]라는 컷제목을 달고 있다. 취재부서에서 정해준 제목이었다. 이 ‘집 아닌 집’ 이란 명칭도 과분하다고 느껴졌다. ‘집 아닌’ 이란 수식을 달고 있으나 어쨌든 ‘집’이라고 부르는 셈이니까. 이곳을 집이라 불러선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월세 30만원 비닐하우스… “여기, 사람 살 수 없어요”]


“여기, 사람 살 수 없어요” 

농장주의 외부인 감시가 심해져서 덩달아 극도로 경계심이 심해진 이주노동자들. 사회부 동기가 어렵게 이들에게 다가간 끝에 얻어낸 한 마디였다. 여기, 사람 살 수 없어요. 이 말을 그대로 제목으로 올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비닐하우스를, 식물을 키우는 데 쓰라고 만든 비닐하우스를 집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꼬박꼬박 월세 30만원씩을 뜯어낼 집이 아니다…. 


데스킹을 거쳐 수정된 제목은 ‘월세 30만원’보단 폭염에 중점을 둬서 고쳐졌다. 글자 수가 길어져 꼭 살리고 싶었던 뒤의 멘트도 “사람 못 살아요”로 짧게 고쳐졌다. ‘여기’ 뒤에 쉼표를 붙여 이 열악한 비닐하우스 꼴을 강조하는 이주노동자의 말이, 제목이 수정된 이후에도 계속 맴돌았다. 단순히 가까운 장소를 지칭하는 지시대명사인 ‘여기’가 이렇게 힘이 실릴 수 있는 말이었던가. 이주노동자가 조금씩 익혔을 한국어, 그중 가장 먼저 배웠고 가장 많이 사용할 대명사. ‘여기’.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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