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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Jul 21. 2021

1천억과 쓸모없음

2021년 7월 15일 목요일 편집자의 일기


“1면, 오늘 세게 뽑아.” 


데스크에서 이런 지시가 내려오면 묘하게(?) 신이 나기도 한다. 나도 기사 내용에 동조돼서 어떤 대상을 타도하는 데 한몫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제목 세게 뽑아’라는 지시는 대부분 막막하다. ‘주먹으로’ 좀 더 세게 쳐봐라, ‘손으로’ 세게 잡아당겨봐라, ‘손잡이’를 세게 쥐어라 등등 신체나 도구를 사용할 때 ‘세게’라는 부사는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감이라도 있지, ‘글을’ 세게 써보라는 말은 정도(正道)가 없다. 욕과 비속어를 쓰지 않고 기사 문법에 맞는 표준어를 구사하면서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히는 글쓰기란 막막하기 그지없다. 다룰 줄 아는 기구가 하나도 없는데 인생 처음으로 헬스장에 들어서는 느낌이랄까. 


악취가 심각한 하수처리장이 있다. 시에서 악취 저감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알루미늄 덮개를 만들어 냄새를 막는 것.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전셋집이 여름철에 끔찍한 하수구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는데, 그 악취는 뭐로 덮어놓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거다. 어쨌든 지자체는 그런 신통한 방법을 고안해 내 250억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주민들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라며 반발하며 나섰고 서명운동까지 벌인다고 한다. 


[안양 석수하수처리장 악취 저감 사업 ‘잡음’ / 

“250억짜리 덮개 쓸모없다” 주민 반발] 


상대에게 타격을 줄 만한 말로 ‘쓸모없다’가 떠올랐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쓸모없다는 말은 그 존재의 존엄성을 훼손하기 충분하니까. 게다가 250억을 들여서 만드는 ‘알루미늄’ 덮개가 쓸모없다니. 이 방안을 구상한 안양시 관계자 입장에서 이만한 제목이면 충분히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편으론 기사에 기재된 시설 개선 총 사업비 ‘1천억’이 마음에 걸렸다. 느낌에 데스크가 원하는 센 제목엔 ‘1천억’이란 액수가 반드시 포함돼야 할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국장은 제목을 보더니 ‘250억’이 아니라 ‘1천억’을 제목으로 올릴 수 없냐고 물었다. 시설 개선 사업비 1천억 중 악취 저감 사업에 할당된 액수가 250억이라 ‘250억짜리 덮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악취 저감 사업에 대해서 반발하는 거지 시설 개선 전체를 힐난하는 건 아니었다. 제목으로 1천억을 굳이 쓰는 건 억지라고 판단했다. 


[안양 석수하수처리장 1천억 예산 쏟아붓지만… /

“하수 악취, 덮개로 못 막는다” 주민 반발] 


1천억을 제목으로 올리는 게 무리라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인 내 생각이었고, 제목은 결국 국장의 지시대로 변경됐다. 나는 ‘쓸모없다’는 말이 훨씬 큰 데미지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쓸모없다’는 말에 무력해지고 마는데, 세상은 숫자에 더 약한 듯하다. 1천억, 너무 커서 실감도 안 되는 이 액수에 말이다. 어쨌든 오늘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쓸모없다’는 평가로 내 존엄성이 훼손될 거라 여긴다는 것. 그런 평가를 듣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 마감시간 내내 고민해서 지어낸 ‘센 제목’에게 오히려 내 약점을 보여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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