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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Oct 30. 2024

해로운 장난

  내가 이 동작을 하면 네가 그 대사를 할 거라는 약속. 그 모든 합을 잊고 있어야 합니다. 수어를 쓰는 사람들은 거짓말이 눈으로 보인다던데. 표정과 손짓, 말과 손짓이 따로 나오기도 하고. 등을 돌리고 있으면 네가 몰래 다가옵니다. 무대가 몇 번이고 반복되더라도 나를 놀라게 할 때 정말로 놀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밤에 산책하기 어려울 거예요. 강변을 뛰는 사람들. 속도를 줄이며 호흡을 바꿉니다. 가장 먼저 이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사람이 누굴까요. 뒷모습이 지겨운 날엔 혼자서 반대로 걷기도 합니다. 너는 이런 일이 흔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언제나 정말로 놀랄 수 있습니다. 이 계절에도 손이 차가울 수 있고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떤 계절을 고를 건가요. 헤어질 때 입었던 리넨 셔츠를 이듬해에도 똑같이 입고 나온 사람. 서먹하다는 듯 너를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고백이 거짓말인지 알 수 있으려면 내일이 되어야겠지. 묻고 싶은 것이 많으면 아무것도 물을 수 없습니다.       


  결말을 다 아는데도 몇 번을 다시 읽는 동화책. 온몸으로 펼친 책에서 아이들은 매번 같은 페이지에서 웃습니다. 오래 기다려 온 약속 자리에 먼저 도착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만난다면 마주 보고 앉을지, 나란히 앉아야 할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웃어야 하는 장면에서 어김없이 웃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 천천히 땀이 식는 걸 느낍니다. 여전히 산책할 수 있는 밤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너의 가을과 겨울의 옷장을 알지 못합니다. 결말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잘되든 못되든 모두 별일이 아닙니다. 이제 계단 위로 네가 올라옵니다. 나는 진심으로 놀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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