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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urmond Jun 14. 2021

내 몫의 신뢰

2021년 5월 24일 월요일 편집자의 일기

편집기자 일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는 ‘처음 떠오른 제목이 수정할 필요 없이 단번에 데스크를 통과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번에 데스크를 통과할 만큼 훌륭한 제목이 처음부터 떠오르는 일은 흔하지 않다’는 게 옳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단번에 데스크를 통화할 만큼 훌륭한 제목, 혹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걸 데스크까지 밀고 갈 용기를 갖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명제가 가장 옳을 것이다. 나처럼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인데, 오늘 제목이 딱 그랬다.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결정으로 국내 소금값이 급등했다. 경기 천일염이 타 지역 소금보다 비쌌는데, 소금값이 전체적으로 오르니 가격차가 줄어들고, 경기도 염전 입장에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문제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도 모자랄 판에 경기도 지원책이 시원찮다는 것. 뭔가를 시도하고 있기는 한데 염전 소유주들의 소극적 태도를 이유 삼으며 염전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제때 배워야 할 걸 못 배우고 뒤늦게 시작하면 괜한 상념이 는다. 그래서 이십대 후반 들어서 자전거 기초를 다시 배우기 시작하며 자전거 실력보다 이상한 개똥철학만 생각난다. 어쨌든 생각났으니 잊기 전에 기록해두자면, 자전거를 아주 못타는 사람이 겨우 균형을 잡고 두 발을 페달에 안착시켰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믿음’이라는 것. ‘저 앞에 지금 사람이 걸어오고 있지만 나는 저들과 결코 부딪힐 일이 없다.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애써 잡은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다. 사실 나의 자전거 실력은 아직 이 단계까지도 이르지 못했다. 


몸 쓰는 실력과 일하는 능력이 어느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 기사 초안을 읽자마자 [짜디짠 경기도 염전 지원책]이 바로 떠올랐다. 제목에 맞춰 지면 레이아웃도 맞추고 제목도 그대로 입력해 저장을 했다. 균형은 잘 잡았는데 이 제목이 괜찮다는 믿음과 데스크까지 밀고 갈 용기가 부족했다. 경기도에서 지원을 아주 손 놓고 있는 게 아니고 이미 2018년에 방안을 마련한 상태인데 ‘짜디짠’이란 수식을 붙여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단지 ‘소금’이란 소재에 ‘짜다’라는 표현이 잘 호응해서,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제목이 될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를 깎아내리는 기사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단어 하나가 회사 전체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결국 자신이 없어져 제목에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고 심심한 제목으로 수정해서 데스크에 올렸다. 


“처음 제목이 더 좋은데?” 

편집부장이 나의 용기 없음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인디자인으로 작업 중인 지면을 저장하면 모니터링 프로그램으로 본인 지면 외에 모든 지면을 다 볼 수가 있어서 내가 지면을 올리기도 전에 부장이 귀신같이 처음 짠 제목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거다.


입사한 지 1년 반. 여전히 균형잡으며 페달 밝기가 어렵고, 균형 잃을까 핸들을 바들바들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간혹 오타가 지면에 나온 날 출근하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는데, 그때 편집부끼리 자성의 시간을 가지며 하는 말이 있다. “나를 믿으면 안돼”그래도 막내라 좋은 점은 나 대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 몫의 자신감을 선배들이 불어넣어주는 지금이 제일 호시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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