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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urmond Jun 14. 2021

여정의 주체가 못 될지라도

2021년 5월 21일 금요일 편집자의 일기

아빠나 오빠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 요새 맛 들인 놀이가 있다. 바로 ‘드림카’ 찾기. 오빠가 운전을 시작하고 아빠 차를 물려받게 된 이후부터 괜한 경쟁심에 차 욕심이 슬슬 생겨난 것이다. 장롱면허여도 예쁜 차, 비싼 차는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서 “어, 저 차 예쁘다” 하면 보통 벤츠, 아우디, 제네시스 같은 녀석들이 걸린다. 곧 죽어도 비싸고 예쁜 차만 골라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대는 통에 옆에 앉은 엄마가 항상 핀잔을 주곤 한다. “그러다 너 i30(아빠가 오빠에게 물려준 차, 그리고 오빠가 새로 차를 사면 내게 물려줄 차) 성에 안 차서 못 탄다.” 


이쯤 되니 심심하면 주변 사람들한테 드림카가 뭐냐고 물어보게 된다. 신기한 건 하나같이 ‘나이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답한다는 것. 젊었을 땐 주로 날렵한 세단에 꽂힌다면 나이가 들면서 더 튼튼하고 안전한, 소위 ‘등빨 좋게 생긴’ 차를 찾게 되다가 더 나이가 들면 또 바뀐다고. 사실 나이에 따라서 드림카가 바뀌는 게 아니라, ‘이 차로 누구를 운반할 것인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젊어서 나 혼자 혹은 짝꿍 한 명 정도 데리고 드라이브 다닐 때랑 결혼해서 가정이 생길 때, 은퇴할 때가 가까워 식구도 살림도 단출해졌을 때 눈에 들어오는 차는 당연히 바뀔 것이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정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평생 인간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모르지만, 누군가를 어딘가로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니까. 그런 식으로 내가 아빠를 자주 기사로 부려먹어서 잘 알고 있다.   


편집기자라는 직업이 운전기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운전대를 잡고 있지만 여정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기사처럼, 편집기자는 제목을 짜지만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가장 먼저 보이지만 늘 마지막이고, 가장 눈에 띄지만 늘 언저리다. 편집기자는 취재기자가 목표하는 지점까지 기사를 끌고 갈 수 있게 잘 ‘모셔드리는 것’이 주된 업무다.  


3월 둘째 주 일주일간 연달아 1면 톱을 장식한 기획기사가 있다. 조류독감,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등 가축전염병이 돌면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곳이 경기도다. 이런 역병이 돌면 그 가축을 살처분해야 하는데 이때 지자체는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상식적으로 경기도 지역 살처분을 경기도 용역업체에 맡겨야겠지만, 수년간 10건 중 9건은 타지역(주로 충청권)과 계약을 맺어왔다. 그리고 그 뒤엔 공무원과 용역업체 간 리베이트를 주고받는 ‘검은 유착’이 있었다. 


스케일이 큰 기사였다. 이쪽 세계에서 자주 쓰는 말로 ‘조지는’ 기사였다. 일주일동안 한 주제로 연속해서 1면 탑을 채웠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만에 경기도에서 대책을 내놨다. 단순히 관계자 멘트 하나 달랑 주며 ‘반응’을 보인 수준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대책을 세워 발표했다. 지역 일간지의 영향력을 보여준 기획이었다. 


담당 취재기자들이 이달의 기자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회사에 전해졌다. 다 같이 일어나 박수쳐주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일주일치 기획기사가 실린 3월 둘째 주 1면 지면을 다시 찾아봤다. 어떤 날은 순조로웠고 또 어떤 날은 궂은소리를 들을 정도로 헤맸었다. 어쨌거나 목적지까지 잘 당도했구나, 여정의 주체가 되진 못할지라도 나는 충분히 이 여정을,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이 일을 즐기고 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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