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과 변혁의 꿈 그리고 잊혀진 기억
사회인으로 20여 년을 살다보니 20대의 대학생시절, 그러니까 가난하지만 생계의 의무에선 벗어나 있던 그 시절의 생각들이 이젠 잊혀졌다. 가끔 그 시절 써 놓은 글을 볼 때가 있으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 또렷이 기억나는 사건들이 있는데 그런 사건들이 참 희한한 게 그 사건의 기억 중 어떤 건 지금에도 잘 이해되고 어떤 건 여전히 ‘왜 그랬을까?’하는 지금으로 봐선 생경한 부분들이 있다.
92학번으로 입학한 우리를 선배들은 조금은 기대를 갖고 혹은 부러움을 갖고 바라봤는데 이른바 ‘9293’의 변혁의 학번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92년 대선이 있고 여기서 ‘어떤 형태’로든 선배들 또 우리도 곧 고대할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 선배들이나 우리나 92년도 중반을 넘어가선 각자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기대’하는 무리로 나눠졌다. 어떤 이는 당시 김대중 후보의 선거자원봉사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경실련의 공명선거캠폐인 자원봉사를 하고 그랬는데 이런 이들에 비해 좀 소수였지만 ‘민중후보 백기완’을 지지하는 대학생단체에 가서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열의는 없지만 반면 그럭저럭 성실히 과동아리나 집회에는 나가던 나를 한 선배가 데리고 갔던 자리가 대선 직전 보라매공원에서 열렸던 백기완 후보의 일종의 ‘출정식’이었다.
사실 속으로 ‘한 천 명이나 오겠지...여기 갔다고 말하면 아버지에겐 참 미친 놈 소리 퍽 들을 거야...’하는 생각으로 갔다. 그날 게다가 춥기도 꽤 추웠다. 영하 8,9도는 됐던 듯. 그런데...그날 보라매공원이 다 찼었다. 한 5만 명은 모였던 것 같고, 물론 대부분은 대학생들이었다. 당연히 이 행사의 클라이막스는 백기완 선생의 연설이었는데 사진의 이 모습처럼 머리칼 휘날리며 우렁차게 ‘민중’과 ‘변화’ 그리고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정말 ‘큰 꿈’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말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물론 연설내용이 기억난다는 게 아니고 그런 감상을 받았던 ‘기억’은 남았다는 얘기다.
사실 똑똑한 선배들, 그리고 같은 학번 친구들 중 목소리 크던 녀석들이 자신있게 말하던 ‘변혁의 당위성’에 슬슬 지치고 그보다는 등록금 벌기위한 과외자리 알아보던 고단한 처지에 백기완 선생의 웅변은 그래도 좁아터진 현실에서 낙관을 보게 하는 힘은 됐던 것 같다.
그런데 그해 대선의 결과는 참 참혹했다. 당연히 백후보의 당선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른바 진보정당을 만들 토대가 될 백만표 정도를 다들 기대했었는데...결과는 보라매공원에 모인 수만 명 정도의 표가 나왔더랬다.
그렇게 9293년의 변혁의 꿈은 날아갔고 한동안은 냉소가 줄을 이었지만 그 뒤로도 백기완 선생은 부지런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로 가서 힘에 찬 연설을 하곤 했다. 하긴 박정희시대의 중정이나 전두환의 보안사 등에 끌려가서 사지를 넘나든 백선생의 경험에 비하면 그런 차가운 현실은 그분의 삶의 길을 바꿀 건 전혀 못 됐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사람들에겐 7,80년대의 고단과 희망...어떤 이에겐 90년대의 변화와 허무한 기억의 한 중심에 서 있던 큰 인물이 사라졌다. 떠올린 기억과 그래서 곧 아쉽게 사라지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