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침침한 곳이 두려움으로 오염될 때마다 나의 대인관계는 곧장 마비되곤 했다. 저릿하다가 이내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무섭고도 희한한 과정이 되풀이됐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이란 존재를 제대로 확인해야만 했다. 두려움의 형체도 모른 채 늘 당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자 문득 두려움의 형체가 궁금해졌다.
'너에겐 딱 이만큼만 줄 거야!'
나는 종종 사랑을 할 때마다 사랑을 재단하곤 했다. 그에게 받은 사랑의 양만큼만 되돌려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되돌려 받은 것이 부족했는지 상대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 혼자만 사랑하는 것 같아."
내식대로 판단한 사랑의 질량은 상대에게 때론 섭섭함을 안기기도 했고 소원함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서로 다른 사랑의 무게는 어떻게든 가늠해볼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했다. 쉬이 재단해서도 판단해서도 안 되는 연하디 연한 성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한결같았다.
'나도 사랑해.'
우습게도 나는 끝까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앙다문 입술이 얼마나 시리던지 사랑했던 그들은 금세 차갑게 얼어붙고야 말았다.
나는 유독 시린 기운이 날마다 샜다. 한 움큼 더 내어주기 싫어서 벽을 치고 살았다. 더는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선을 긋고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행여 상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 버리면 금방이라도 나 자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사실은 네가 간절했노라고, 그런 사랑이 그리웠다며 목놓아 펑펑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린 나는 부모의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부터 차츰 변해갔다.
깨져버린 부모의 관계로 반쪽짜리 사랑을 마주하고서 알게 된 건 사랑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나 마땅히 가질 수 있어도 똑같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도 알아버렸다.
하나의 사랑이 둘로 쪼개지고, 부실한 반쪽짜리 사랑마저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자 나는 어디에도 사랑을 구걸할 수가 없었다. 갖고 싶지만 탐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내겐 사랑 말곤 어떤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사랑을 염탐했다. 빛나고 영롱한 사랑의 그림자를 쫓아다녔다. 그러면서도 평생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심연의 절망을 키워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도 그 사랑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겐 그저 갖고 싶지만 탐해서는 안될 부류의 것일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포근한 사랑은 때때로 나를 찾아왔다.
봄날을 걷게 해 주고 달콤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함께 나눈 사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고 짜릿했다. 그럴수록 더욱 가까이서 그 사랑을 좇고만 싶었다.
어느 날 불현듯 내 안으로 성큼 들어온 사랑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을 놓칠 수가 없었다. 다시 그 공허함을 견디기 끔찍이 싫어서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그를 꽉 붙들었다. 손아귀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는 기겁하며 포효했다. 뒷걸음질 치며 벗어나려는 사랑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숨겨진 집착을 마주했다. 그러자 나만의 두려운 상처를 보았다.
그래서였을까.
사랑을 시작할라치면 온몸에서 뱉어내는 기운이 한겨울의 시린 칼바람 같기만 했다. 주위로 엉겨 붙던 따스한 사랑들은 하나둘 추위에 질려버린 채 곁에서 떠나갔다. 그렇게 하나둘 사랑이 떨어지자 홀로 외로이 먼 겨울을 견뎌야만 했다.
독한 겨울을 지내고서 나는 두 번 다시 내 안에 사랑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만의 사랑 공식이 생겨버린 셈이다. 그래서 상대가 준만큼만 건네주고, 내가 준 만큼만 되돌려 받기로 했다. 나는 주고받는 사랑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렇게 사랑을 논하는 상대와 편을 나누고 핑퐁게임을 하듯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연하게도 그런 사랑은 더 이상 깊어지거나 넓어지지 않은 채 어설피 끝이 났다.
나는 사랑이 고팠다. 재고 따지는 사랑 말고 남들처럼 마땅히 주어지는 평범한 사랑이 말이다.
특별할 것도 빛날 것도 없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사랑이 내겐 무척이나 간절했다.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사랑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외려 그런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들 조차 모른 채 당연하듯 삶을 살고 있었다. 오롯이 잃어버린 자들만 원하고 절규하는 사랑인데도 그들에겐 그저 평범한 사랑이었다.
때로는 사라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잃어버려야 소중함을 깨닫기도 한다.
잃어버린 자의 구슬픈 울음은 마치 독사에 물린 듯 온몸에 퍼지는 독과 같았다. 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꾸만 공허함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바짝 메말라 버린 앙상한 나무처럼, 그 어떤 사랑의 물줄기도 내 안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잃고서야 사랑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내가 보였다. 또다시 먼 겨울을 겪지 않으려면 더 큰 사랑을 갈구할 게 아니라 사랑을 받을만한 품을 들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