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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경 Jul 26. 2021

미운 우리 며느리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무지개 눈동자가 보이나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엄마랑 평생 살아주면 안 될까?”

“엄마, 사랑해요! 전 평생 엄마랑 살 거예요.”

“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새끼손가락을 건 용의 눈이 초롱이 빛났다. 

와락 엄마품으로 안긴 소년 용이는 엄마의 살결에 자주 코를 박곤 했다. 살 틈으로 벤 엄마의 냄새는 맡을 때마다 편안한 기운이 솟았다. 마땅히 엄마와의 평생을 약속할 만도 했다. 용의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높은 산자락 어느 터전에 용의 가족들은 땅을 파고 벽돌을 세웠다. 빨간 벽돌이 겹겹이 쌓인 집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흰털이 수북하고 눈썹마저 하얀 새가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싱그런 아침을 노래했다. 사방을 아름다운 노래로 달구고 나서야 하얀 새는 해가 높이 솟아오르기 전에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빨간 벽돌집에 사는 네 식구는 용이와 용이 누나, 그들의 엄마와 아빠가 살고 있었다. 네 식구는 날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하얀 새의 지저귐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곤 했다. 벽돌집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에는 감자와 고구마가 땅 속 깊이 자랐고, 갖은 야채와 과일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텃밭을 지나면 아래로 깊은 자락에 개울물이 흘렀다. 개울물 건너로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길 따라 세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단 한 번도 그 너머를 넘보지 않았다. 아니,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만족스럽고 풍족했기에 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게 투명한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서 남매는 봄여름이 되면 퐁당퐁당 물장구를 치면서 한 시절을 보냈다. 물가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다 불을 지펴 구워 먹었고, 텃밭에서 나는 싱싱한 채소들을 한 바구니 따다가 끼니를 누렸다. 아버지의 곡괭이질에 감자와 고구마를 거두는 날에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푹푹 쪄가는 냄새에 달큰한 군침을 쏟아내곤 했다.      

남매는 우애가 깊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오순도순 말썽 없이 자랐다. 그중에서도 막내 용은 식구들에 비해 호기심이 넘쳐났다. 개울가에서 놀 때마다 개울가 너머의 가시덤불 속을 무척이나 궁금했고 그쪽으로 다가갈라 치면 식구들은 몹시 화를 내곤 했다. 

“용아! 그곳은 절대 넘보지 마라!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다른 곳이야!” 

그럼에도 용의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느 날 용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처음으로 개울가를 건너가 보았다. 얼떨결에 건너온 가시덤불 안으로는 흐릿한 길 하나가 나있었다. 용은 점점 깊은 풀숲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거닐다가 나뭇가지로 듬성듬성 얽힌 움막을 발견했다. 그 안으로는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용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아이의 몸에도 용의 몸처럼 여기저기 가시덤불에 긁힌 자국이 여럿 나있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동그란 눈과 높은 코 거기에다 작은 입술이 힐끗 보였다. 여자아이의 하얀 눈과 마주친 순간, 용의 볼은 별안간 불그스름해지고 말았다. 용은 가까이 다가가 겨우 입을 뗐다.

“안녕?”

하얀 눈을 껌뻑이는 여자아이는 용을 가만히 바라봤다. 홀딱 젖은 옷차림이 가여웠는지 여자아이는 뒤편에 있는 때 묻은 담요 하나를 꺼내 그의 어깨 위에 걸쳐줬다.

“고마워. 내 이름은 용이야. 네 이름은 뭐니?”

“난 우리라고 해.”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용이 슬며시 내민 손 위로 우리의 손이 겹쳐지자 이내 두 사람은 발맞춰 숲 속을 뛰놀았다. 한참을 흙과 나무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서야 용은 벽돌집으로 돌아갔다. 용의 몸에는 가시덩굴에 베인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 용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도 용은 자주 개울가를 건너 다녔다. 밤만 되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오는 용이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마침내 그의 뒤를 쫓아 보기로 했다. 가시덤불 안에서 용을 기다리는 우리를 보는 순간, 가족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렇게 형편없는 아이와 함께 놀다니, 믿을 수가 없군.”

용의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 저 아이 눈 좀 봐!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용의 어머니가 말하자마자 용의 누나가 거들었다.

“믿을 수 없어! 그깟 누더기를 걸친 저 아이 때문에 우리 용이가 가시에 찔리다니!”

용의 가족들은 흙성을 쌓고 노는 그들을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다가 슬금슬금 벽돌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그날 밤, 용이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용의 아버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 가시덤불을 더 높다랗고 촘촘하게 쌓아서 빽빽한 장벽을 만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우리의 하얀 눈에서 붉은 눈물이 처량하게 맺히고 말았다.  

다음날, 높다란 가시덤불이 눈앞에 펼쳐지자 영문을 모르는 용이는 절망했다. 그런 용이를 가시덤불 틈으로 지켜보던 우리는 주황색 눈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그때, 하늘에서 하얀 새가 날아왔다. 높다란 가시덤불을 주둥이로 싹둑 잘라내고는 우리가 사는 움막의 빈틈을 꼬박꼬박 채우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우리의 집은 풍성해졌고 용이는 듬성한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시 우리를 만났다. 둘의 웃음소리가 건너편 벽돌집에도 다다르자 이번엔 용의 엄마가 개울가로 내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용아! 엄마가 여기서 발을 헛디뎠구나! 엄마 좀 도와다오!”

깜짝 놀란 용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와 엄마를 부축했다. 이번에 우리의 눈에서는 노란색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며칠간 용의 엄마는 발에 붕대를 두르고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간호하던 용의 마음은 오로지 가시덤불을 향했다. 그리움이 가득 찬 용의 눈물을 보자 우리의 눈에서도 초록색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며칠간 가시덤불을 헤집을 일이 없자 용의 몸에 난 상처는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용의 가족들은 상처 주는 사람을 멀리해야 제 모습이 온전해진다면서 그를 달랬다.     

어김없이 하얀 새는 아침마다 찾아와 지저귀고 따스한 햇살은 벽돌집을 비췄다. 용은 이상하게도 날마다 창고에 틀어박혀 뚝딱뚝딱 망치질만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되도록 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은 내내 망치로 만들었던 물건을 창고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개울가를 잇는 다리였다. 용은 조각 나무로 이어진 기다란 다리를 힘껏 들어서 가시덤불의 저편을 향해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 위로 걸어오는 용이를 지켜보던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 찬 파란색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그간의 그리움을 한껏 눈물로 쏟아내며 서로를 따스히 안아주었다. 그때 둘을 지켜보던 용의 어머니가 그 다리를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저만치서 씩씩대며 다가온 그녀는 그들의 공간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용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세웠다. 어머니는 용의 손에 묻은 흙을 털털 털어가며 맞은편에 서있는 우리를 매서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지저분해진 용의 손이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신의 손에 묻어있는 흙을 숨기며 등 뒤로 감췄다. 괜히 잘못을 한 것만 같아 그들 앞에서 미안한 눈물을 지어 보였다. 파랑보다 짙은 색의 눈물이었다.      

용의 어머니는 용을 끌고 다시 다리를 건넜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가는 용의 눈은 애처롭게도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에도 용은 다시 다리를 건넜고 이번엔 용의 누나가 뒤따라왔다. 그녀는 우리가 사는 움막을 힘껏 걷어차며 말했다.

“우리 용이와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했지! 정말 볼품없는 쓰레기 집 같으니라고!”

한쪽이 기울어진 움막은 금세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걸 지켜본 우리는 풀썩 주저앉아 무너진 움막 앞에서 보라색 눈물을 떨구었다. 그날 밤, 일곱 색깔 무지개 눈물을 쏟아낸 눈물들이 커다란 구름으로 뭉쳐져 용의 가족이 사는 벽돌집을 에워쌌다. 곧바로 세찬 폭풍이 되어 번개와 비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지붕 위를 덮고 있는 벽돌들이 바람에 들썩이다가 하늘로 날아갔고, 나무로 이어 붙인 문살은 안팎으로 부풀어졌다가 댕강 끊어졌다. 네 식구는 바닥에 옴짝 달라붙어 흩어져가는 집의 잔재를 붙잡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무너진 용의 집을 지켜보던 우리가 마침내 다리를 건너왔다. 그녀가 벽돌집으로 다가가자마자 폭풍은 멈추었고 선명한 일곱 빛깔 무지개가 덩그러니 피어났다. 용의 가족들은 마당에 피어난 아름다운 무지개는 안중에도 없이 다짜고짜 우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밀쳤다. 

“용이가 너를 만나고 나서부터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너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우리는 그들의 말처럼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고개를 떨궜다. 무지개 눈물이 툭툭 바닥을 적셨다. 그때, 용이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무지개 눈물을 닦아주자, 우리의 하얗던 두눈은 금세 무지개색 눈동자로 변했다. 그런 눈을 마주친 용은 넋을 잃고야 말았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도 용의 눈에 비친 제 눈의 무지개를 보면서 벅찬 기쁨을 느꼈다. 서로를 황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그렇게 부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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