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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미 Oct 22. 2024

아흔, 나이가 뭐 어때서?

영자씨 이야기

< 아흔, 나이가 뭐 어때서? >  구본미

(초고 2024. 5. 20 퇴고 2024.10.15)


영자씨의 불면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수면제의 도움으로 잠을 청해 오다 복용하는 약의 종류가 너무 많아 수면제부터 줄였더니 매일 '잠과의 전쟁' 중이다.


잠자리에서 양을 몇 마리를 세어도, 술을 조금 마셔도, 책을 봐도 백약이 무효다. 쓸데없는 공상으로 밤을 새우며 기와집을 몇 채 지었다 헐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남편이 먼저 가시고 영자씨가 독거노인이 된 지는 한 20년쯤 됐다. 상을 당하고 3년 동안은 주변 사람들 시선이 부끄러워 밖에 나다니지 못했다. 상중인 과부가 남의 눈에 손가락질과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뭐 그리 두렵던지? 그땐 그랬다. 차츰 삼시세끼 밥상을 챙겨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실감했고, 옆집 마실 가는 것도 자유롭게 되었다.


노인 복지관을 알게 되어 수영, 탁구, 당구, 붓글씨, 합창, 노래교실, 요가, 기체조, 그림 교실에 날마다 다니며,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참말 좋았다.


그런 영자씨에게 코로나 3년 동안 복지관이 폐쇄 되어 갈 곳이 없었다. 수업을 받으며 사귄 친구들도 만나기 힘들었다. 코로나가 종식되자 다시 복지관에 나갔지만, 전에 만났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고 낯선 얼굴이 많아 전처럼 재미가 없었다. 그동안 더 먹은 나이와 쇠약해진 근력으로 오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고민하다 복지관을 그만두기로 했다.


하루 종일 집순이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행히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생겨 소싯적 가수의 꿈을 간직했던 영자씨에게 재미를 주었다. 비슷한 경연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 전 국민 열풍이 불어 과열되자 흥미가 떨어졌다.


손자가 핸드폰으로 고스톱 게임을 깔고 알려 줬다. 핸드폰 속에서 신나게 돈을 벌고 있는데 뭘 잘못 눌렀는지 게임이 사라져 난감할 때마다 가족들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해 무료함을 달랬다. 카톡이나 유튜브라는 아무리 배워도 두렵기만 했다. 익히기만 하면 훨씬 재밌고 덜 심심할 텐데!   


오랫동안 운동을 못하고 지낸 것이 문제가 됐다. 하루 3,000보가 목표인데 여의찮다. 근육이 빠져나가서 팔다리에 힘이 없다. 종일 눕고 싶고, 밤잠을 설진 탓에 늘 피곤하다. 요즘 부쩍 끼니 챙기는 것도 힘에 부친다.

자식들이 이것저것 반찬을 해 오지만 내가 담근 오이지나 동치미가 입맛에 더 맞는다. 스물셋에 결혼해 일곱 식구 밥과 다섯 자녀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고, 손자 손녀 키워 주고 사위 넷의 밥상 술상까지 해 낸 손맛이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주중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어 말이 하고 싶어도 사방 흰 벽밖에 없을 때 불현듯 외로움이 스친다. 몇 안 되는 친구에게 전화 한두 통 걸고 나면 가족에게조차 전화할 곳이 별로 없다. 이렇게 살 거면 빨리 영감님 옆에 드러눕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부쩍 든다. 일상적인 거동도 힘들고 행동 속도가 점점 느려져. 모두 귀찮고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일요일 오후에나 마지못해 얼굴을 내미는 맏딸과 사위에게 말한다. "얘 나는 꼭 죽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살면 뭐 하니? 아무 의미 없이 밥만 축내며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딸은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고,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요. 사람의 목숨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잘 아시면서요?"


"변호사 사무실에 상속 문제로 상담 전화를 걸었더니 지금은 바쁘다고 전화로 답을 주겠다던 여직원이 늙은이가 장난친

전화인 줄 알고 꿩 구워 먹은 소식이다. 늙었다고 사람 취급을 못 받으니 분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심겠다고 하니 자녀를 데리고 와야 한다며 치료를 거부당했다고 한다.


 "진료비 못 받을까 봐서 그런 건지 나이 많다고 도대체 사람 취급을 못 받으니 가 막힐 노릇이다. 내 돈 주고 내가 쓰는 것도 나이 먹으면 맘대로 못 해."


 "설마 그랬겠어요? 연로하시니 혹시 무슨 일 있을까 싶어 그런 거겠죠" 에둘러 위로를 해도 안 먹힌다.


한 번은 기력이 딸려 사슴 생뿔을 자른 녹용을 구하려고 전화로 문의를 하니 역시 답이 없다고 한다. 구매 능력 없는 노인에게 판매를 꺼리는 눈치더란다.


젊어서 평화시장에서 큰 옷 공장과 가게를 운영했고, 집을 지어 되파는 집장사를 했던 사업가 영자씨는 세월이 억울하다. 많은 종업원과 일꾼들의 월급을 책임지며 일을 가르치던 사장이 이제 와서 나이 든 독거노인이라니?


아직도 부동산에 드나들며 집 시세를 챙길정도로 정신이 또렷하고 은행거래도 직접 다니며, 자식들에게 아직까지 손 한번 벌려 본 적 없는 당당한 영자씨를 누가 좀 알아보면 좋겠다. 연로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개인이 무시 당하는

설움에 속으로 소리쳐 본다.


"얘들아 너희는 내 나이 아흔 안 돼 봤지? 나는 네 나이 진작에 되 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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