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시작
결혼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고려할 수 있을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를 4분의 1쯤 오디오북으로 들은 이 시점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너무 어려서 결혼할 때는 인생의 여러가지 경험이 적어서 경솔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나이 들어서 결혼하거나 남들이 말하는 적령기에 결혼한다고 해도, 지나고 보면 누구나 그때 좀 경솔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누군가를 오래 사귀었고,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채로 결혼했다고 해도, 잠깐 사귄 채 결혼을 서둘렀다고 해도, 결국 결혼한 다음의 그 사람은 낯선 사람일 것이다. 그 낯선 사람과 함께 서로 잘 맞춰 나가고 사랑하면서 결혼 생활을 만들어 만들어나가면 된다. 그 사람이나 내가, 누구도 맞춰 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면, 그래서 잘못된 결혼이 되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결혼은 운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나'는 부모를 모두 잃고, 소문 퍼트리기 좋아하는 어떤 상류사회 부인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21세 아가씨다. 감성적이고, 은근한 무시를 당하며 살아온 '나'는 수줍음도 많고 자신감도 없다. 하지만 혼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릴 때면 누구보다도 생각이 많고 감각도 있는 아가씨다.
그런 아가씨가 한 호텔에서 부인의 잔신부름을 하며 지낼 때,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42세 남자이다. 아가씨의 내면의 매력을 알아본 남자는 매일 아가씨를 드라이브시켜주며 자신감을 북돋아 준다. 그러는새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다. 보호자나 가족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고 보살펴주면 당연히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내'가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갑작스레 남자가 '나'에게 청혼한 것이다.
남자는 호텔의 아침식사 자리에서 마멀레이드를 먹고, 오렌지가 무척 시다고 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청혼했다. 결혼식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하고 시청에 서류만 내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사랑하는 그 남자를 떠나기 싫어서 청혼을 수락한다. 그러자 '나'가 모시고 있는 부인에게 결혼소식을 어떻게 알리겠냐고 해서, '나'는 그 남자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나는 기다리고, 남자가 가서 부인에게 말한다.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남자와 함께 가서 부인에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았나 하고 후회하고, 방에서 나간 뒤 부인이 '나'에게 하는 악담에 약간 흔들리기도 한다. 부인이 말하기를 '그 남자가 널 사랑한다고 믿지는 않겠지? 그는 전부인이 죽고나서 그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너와 결혼하는 건지도 모르지.' 라고 말했다. 전부인의 이름은 레베카였다.
내 생각에 '나'는 불행한 결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약간 느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도, 상류사회의 남편을 두고 저택을 관리하는 멋진 안주인이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남자가 자신에게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건 아마 시간이 없어서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가 이미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고아 소녀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사랑이 없더라도 일단 기회를 잡아 결혼해야하지 않을까? 그 남자가 부자라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봐 라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그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놓쳐 버린다면, 평생 다른 사랑을 만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고아가 나이많고 사려깊은 부자 남자를 만난다는 설정은 진부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진부한 설정에서 시작해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를 기대하게 한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장밋빛 생활이었을까? 왕자는 한결같았을까? 신데렐라는 한결같았을까? 그 두 사람은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떻게 타협하고 대화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 최초의 사건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까? 그렇게 그 두 사람의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성장할 것인가?
나 역시 연애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남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잘 안다고 착각한채 결혼했다. 그래서 신혼때 새로 발견한 맘에 들지 않은 모습에 많이 신경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발병에 우리는 공통의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대화하며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일련의 이 과정에는 우연과 의지가 반반씩 섞여 있고, 그것을 우리는 잘 살아낸 것 같다.
시작의 삐끗함도, 중간에 자꾸 발을 삐게 하는 위기도 사실 그리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것인가인데, 나는 그래서 소설속 '나'도 잘 살아내었으면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슬픔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어떻든 '내 인생'인 것이다. 뒷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