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집 쪽으로 불어왔다. 키 큰 풀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긴 머리를 휘날렸고, 나는 이곳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지배하는 여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환상을 깨듯 벌집 부스러기 하나가 내 콧구멍 속으로 들어와 재채기가 났다.
“에취!”
왠지 이곳에 하루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풀도 뽑아야 하고, 그리고... 여긴 할 일이 많았다.
최진이라는 남자가 풀을 깎아준다고 했으나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신세를 지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손을 타지 않고 온전히 내 손으로 하고 싶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남들이 해 놓은 일이 무엇이건 못마땅할 때가 많았다. 회사 일도 남들에게 나눠주지 못하고 내가 다 끌어안고 하는 편이었다.
“믿는 도끼에 언제나 발등 찍히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줘도 그런다. 저작권부 직원들은 원서 하나 검토하는데 며칠이 걸리는지도 모르겠다, 검토서를 딱 보면 정말 가관이다. 도대체 그러니까 이 책의 줄거리가 어떻다는 건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건지 알쏭달쏭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결국 내가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했다. 그뿐인가. 그전에는 도서 중개 에이전시에서부터 수십 권되는 검토서를 받아 가방에 넣은 뒤, 버스를 타고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새 책들을 검토할 땐 뿌듯하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즐겁게 일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엔 어떤가. 완전히 책 형태를 갖춘 PDF 파일을 모니터에 띄우기만 하면 손가락 하나로 까딱까딱 하면서 서역 만리 바깥에서 방금 작업을 끝낸 책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온갖 핑계를 대며 게으름들을 피운다.
총무부에서는 분기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도서의 판매보고도 해야 했는데 고의인지 실수인지 판매부수에 0자를 하나 이상 빼먹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걸 본 저작권 중개 에이전시의 사장은 나한테 전화를 걸어 노발대발했고 나는 기상천외하고도 우연한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라고 변명하면서 거래처 사장과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편집부는 또 어떤가? 출간 마감에 쫓겨 날림 교정에다 오역, 오자도 바로잡지 못한 채, 책 제목만 요상하게 바꿔서 번역 출간본 상판에 떡 하니 붙여놓곤 하지 않았나?
디자인부는?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졌음을 인정해야겠다. 사장도 비주얼이 중요하단 걸 10년 만에 인식한 것 같으니까. 그전에는 번역판 속 일러스트의 색깔이 원서와 심각하게 차이나는 일이 보통이었다. 새로 찍어낸 책의 일러스트가 알고보니 잘못 재단되어 있어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진이라는 남자는 한눈에 그리 의지할 만한 사람 같지 않았다. 한 마디로 꺽다리 말라깽이에다 농사꾼 치고 팔다리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얼굴은 햇볕에 타지도 않는지 희어멀끔하고 주의 깊은 눈동자에...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거지?”
어쨌든 무슨 연구실에서 피펫으로 극소량의 약품을 떨어뜨리는 작업에나 어울릴 듯한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내가 손가락 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야 할까?)도 마찬가지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의 현실은 ‘동네 총각 최진’. 다시 말해서 이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노동으로 먹고살면서 이웃에 사는 노인네들의 치다꺼리를 하는 데 삶의 보람을 느끼는 지루한 노총각이었다. 그가 무슨 요령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이 정도로 넓게 널브러져 있는 땅의 잡풀을 깎아 없앨 수 있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먼저 풀 깎는 기계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렇지, 배낭 메듯이 멘 뒤 오른손으로 모터에 연결된 가느다란 끈을 힘껏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었다.
“아이쿠야, 뭐가 이렇게 무거워!”
절로 신음소리가 다 났다. 하지만 수영선수냐며 늘 놀림감이 되었던 나의 떡 벌어진 어깨는 부르릉 힘을 냈다. 드럼통 같다는 종아리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세 번 만에 나는 무거운 모터가 달린 기계를 어깨에 진 채 대지에 우뚝 설 수 있었다. 끈이 어깨에 파고드는 듯했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다음번엔 꼭 어깨에 뭐라도 대야겠다.
모터를 시동시키는 끈은 한번 만에 제대로 당겨져서-역시 나야!- 모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땅에서 10센티미터쯤 떨어지게 날을 대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풀은 신기하리만큼 쓱쓱 잘려나갔다. 향긋하기도 하고 비린내 같기도 한 요상스런 풀 벤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나는 닌자처럼 팽팽 돌아가며 하늘을 가르는 표창이라도 날리는 기분이었다.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그르 돌며 주변의 풀을 동그랗게 깎아 보기도 했다. 이 속도라면 이 넓은 마당의 풀을 금방 깎을 수 있지 않을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절로 나오는 승리의 웃음을 수줍게 감추며 호호거렸다. 그때였다.
“딱! 따닥!”
“아야!”
정강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바닥에 있던 돌멩이가 풀 깎는 기계 날에 튀어서 다리에 딱 부딪힌 거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기계 날을 조금 올려 잡았다. 그런데 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적군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슥슥 쓰러진 건 좋았는데, 결국 그 쌓이는 시체 때문에 나는 깎는 면적을 좀처럼 넓힐 수가 없었다. 일단 시체를 치워야만 손쉽게 또다시 살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일단 이 무거운 기계를 땅에 내려놓으면 다시는 어깨까지 들어올려 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까 먹은 빵 쪼가리는 별로 에너지를 못 냈다. 그러게 왜 맛없는 통밀 빵 같은 걸 사 오냐구. 나는 괜히 내게 빵을 사다 준 친절한 동네 ‘총각’을 흉보며 입을 비쭉거렸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냥 한 줄로 간격을 지어 풀을 깎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니, '아버지의 집'이라는 베르사유 궁전 앞에 높이를 맞춰 네모지게 깎은 미로 정원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데...”
난 기계를 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아야!”
당연히 풀 밑동이 엉덩이를 찌르고 만 것이다.
“이게 뭔 일이래...”
난 울상을 하며 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잠시 그러고 있으면서 이런 곳에 집을 산 아버지 흉을 조금 보았다. 아버지 흉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아니라, 아직 살아계시는 듯 정겹게 느껴진다.
어김없이 뱃속은 꼬르륵거렸고, 나는 이번에는 통귀리 빵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밥을 할 기운이 없었다. 물론 반찬은 하나도 없었고. 뻐근한 몸을 일으켜 보니 맨다리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고, 풀잎이랑 흙 같은 게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시내에 다녀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도 나이 먹었나 보다. 요즘엔 통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종잇장 같이 뻣뻣한 빵을 되새김질하고 있으려니 달달한 것이 간절히 먹고 싶어졌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유품을 조금씩 갉아 없앨 수밖에 없었다. 오디술이었다.
포도주처럼 짙은 붉은 색을 띤 오디 술. 술병 아래에는 까만 오디가 가라앉아 있었다. 도시에서는 오디를 보기가 쉽지 않다. 재작년엔가 아버지가 맛을 보라고 일부러 사무실까지 가져오신 적이 있었는데, 온통 여자 천지인 편집부 직원들의 호들갑으로 사무실이 떠나갈 듯했다.
“어머~ 오디라고요? 그 말로만 듣던 오디를 먹어 보다니!”
새까만 미니 포도 같은 모양에 검은 즙이 좔좔 흐르는 오디, 길쑴한 열매 위쪽에는 연초록 꼭지가 달려 있었다. 꼭지조차 한없이 연해 보였다. 우르르 몰려든 직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하나씩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음, 그냥... 맛있네요.”
갑자기 사무실이 조용해진 듯했다. 나도 한 입 먹어보았다. 맛이 밍밍했다. 밍밍한 단맛이라고나 할까? 특유의 옅고 독특한 향내마저 감돌았다. 달고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진 직원들은 손가락을 휴지에 문지르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그때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도우너’ 같이 생긴 편집자가 아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도우너는 그 즈음 어린이 식물 책을 편집하는 중이었다. 오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할 듯 중얼중얼 읊기 시작했다.
“오디는 뽕나무 열매로 해마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직전에 열리죠. 보다시피 검은 빛의 자주색을 띠고 있지만 처음에는 연초록색이에요. 오디의 효능을 말해 볼까요? 오디는 관절을 부드럽게 하고, 머리가 세는 것을 막아 주며, 콜레스테롤을 낮춰 주고, 숙취해소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이 말은 어린이 책에는 넣지 않았지만….”
도우너는 동글동글한 손가락 끝으로 역시나 동글동글한 코를 문지르며 호호 하고 웃었다. 그러자 직원들이 다시 오디 쪽으로 손가락을 뻗어 부지런히 입속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책 만드는 편집자들은 그야말로 온갖 상식을 다 꿰차고 있다. 분야도 다양한 책의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관계를 조사해 가며 몇 번이고 훑기 때문이다. 아마 출간된 책 중 담당 편집자가 읽은 횟수만큼도 안 팔린 책들이 수두룩할 거다. 하지만 평생 사무실에서 컴퓨터만 붙잡고 앉아 있는 그들이 전문적인 내용을 줄줄 읊을지언정 그 내용의 십 분의 일만큼이라도 진짜배기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꺅! 이게 뭐야?”
푸드덕 소리와 함께 작은 벌레가 이번에는 깜찍이의 가슴께에 떡 하니 붙어버렸다.
“어머, 깜찍 씨,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이번에는 곤충 책을 만들고 있는 깝죽이의 무대였다.
“오, 이거 노린재 아니예요? 이 봐봐, 등껍질이 사람 얼굴 모양이잖아요. 어디 보자... 이거 북쪽비단노린재 같은데요? 어어~ 만지지 말라구요. 노린재 뒷다리에 냄새 샘이 있어서 손가락에 냄새 밸 지도 몰라요.”
“무슨 냄샌데요?”
깜찍이가 잔뜩 긴장을 하며 콧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깝죽이가 깝죽거리면서 웃었다.
“숙녀가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냄새예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에구 성질 나! 누가 숙녀야? 좀 솔직해지라구. 무슨 냄새는 무슨 냄새야? 곤충 이름 보면 몰라? 노린재니까 노린내 나지 않겠어? 이런 헛똑똑이들! 노린내라구, 방귀 냄새, 방귀 냄새라구! 뿡!”
때맞춰 문을 열고 들어온 부사장이 거대한 엉덩이를 돌리면서 진짜로 방귀를 뿡 하고 뀌었다.
“으악~!”
노린재는 창문을 꼭꼭 닫고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 놓은 사무실 어딘가로 틀어박혔다. 그날 깜찍이는 가슴께에서 '숙녀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냄새‘가 난다며 종일 징징거렸다.
나는 난장판 속에서 머리에 손을 얹고는 원고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때 오디가 담겨 있는 유리용기에서 까만 무엇인가가 움직거리고 있었다. 굵직한 개미, 개미였다.
‘아버지도 참, 오디를 씻지도 않고 가져오셨나 봐.’
하긴 오디를 씻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노린재에다 이제 개미까지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얼른 슬며시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가 화단에 개미를 놓아주었다. ‘아무리 자그마해도 생명은 생명이지 않은가!’ 라고 비장하게 속으로 되뇌이면서.
그랬던 내가(!) 오늘 수많은 벌떼들을 죽도록 방치했다. 아니, 그들의 죽음을 조장했다. 할아버지와 ‘총각’ 최진의 눈에 띄지 않았던 화장실의 벌떼들에 대한 정보까지 스파이처럼 은밀히 알려주면서 말이다. 벌들이 날 공격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오늘 풀을 깎으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메뚜기 같은 곤충들을 날카로운 날로 반토막 냈을지! 어제 방에 걸레질하면서 죽인 다리 긴 유령 같은 장님거미들은 또 어떤가? 내일부터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빗자루로 앞길을 쓸고 다니면서 살생을 피하려는 스님들처럼 살아야지! 암, 그럴 것이고말고.
술에 취했는지 주정뱅이처럼 감상에 젖어서 혼잣말을 해 댔다. 그러다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볼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아이구, 또 시작이야, 난 너무 술에 약해.
'삐리리~'
휴대폰이 부르르 떨면서 도마뱀처럼 방바닥 끝으로 미끄러졌다.
“여보세요. 흑.”
“저, 이나 씨죠? 무슨 일 있어요? 저 최진인데요...”
“에?”
동네 ‘총각’ 최진? 이 스토커 같은 인간 같으니라구. 내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
“아...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차에 전화번호 써 있던데요. 그런데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왜 울어요?”
최진이라는 남자는 마치 내 생각을 실제로 듣기라도 한 듯이 대답을 했다. 뭐, 우연이겠지. 울적했던 생각들이 싹 날아갔다. 그런데 이 인간이 왜 나한테 자꾸 참견하는 거야?
“저, 무슨 참견을 하려는 건 아니고요...”
엑?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남자, 무슨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콧물이 나와서...”
“아, 네... 다름이 아니고, 차 좀 잠깐 빼 주셔야겠는데요, 어쩌죠? 수고스럽지만 내려오셔야겠네요.”
“아, 예. 그래야죠. 지금 곧 갈게요.”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주차 공간이 아주 넉너억한 시골에서 차를 빼 달라니? 아버지 집에 잠깐만 들를 요량으로 회관 앞마당 중간에 아무렇게나 주차해 둔 차가 생각났다. 그런데 벌써 이틀째... 순간 머릿속으로 레이저 광선이 훑고 지나가듯 '쏴아' 한 느낌이 들었다.
‘하... 그런데 거기까지 어찌 내려갈꼬?’
맘을 좋게 먹기로 했다. 내려간 김에 대형마트에 가서 먹을 거나 왕창 사 와야겠다고.
나는 사방 긁히면서 풀숲을 헤치느라 양팔을 허우적대며 비틀비틀 산길을 내려갔고, 술을 마신 나를 대신하여 최진이가 회관 앞마당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내 차를 구석으로 다시 주차해 주었다.(커다란 대형트럭이 회관 앞마당에 쌓아 둘 비료를 배달하려고 와 있었다.) 그리고 회관 바로 옆에 있는 최진이 집에서 환장한 채 최진이 어머니가 끓여 주신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그런 다음에는 최진이 차를 얻어 타고 시내 조그만 마트에 가서 쌀이랑 라면이랑 과자랑 커피, 기타 등등을 최진이 돈을 빌려 샀고(지갑을 깜박 잊고 안 가져갔다.), 산 물건들은 저녁 어스름에 몽땅 최진이 등에 실려 산 속의 오두막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