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함없이 어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고 차는 도로를 달리고 비둘기는 떼를 지어 다녔다. 무언지도 모를 것을 부리로 쪼아 먹으며 사람들을 피해 슬금슬금 날아서 자리를 옮겼다.
며칠 전 새똥을 맞았던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날 뚜욱 머리에 떨어진 새똥의 무게감이 절로 생각났다. 괜히 위를 한번 쳐다 보고는 신호등을 바라봤다. 시간은 자연히 흘러갔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즈음 신호가 바뀌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버스 정류장에 섰다.
"송풍기가 가동됩니다."
바람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한참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계속 가동을 원하시면 움직여 주세요."
나는 한걸음 움직였는데도 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원래 자리에 섰더니 내 앞에 사람이 걸어왔다. 그제야 다시 바람이 나왔다.
'내 움직임은 인식도 못하더니'
괜히 심술이 났다. 나는 센서기도 감지 하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걸까, 세상에 존재하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인가 하고 괜한 비약을 했다.
504번 버스는 머지않아 내 앞에 섰고 버스에 올랐다. 교통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으니 위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왔다. 도로의 열기는 오간데 없고 버스 정류장의 후덥지근한 송풍기 바람과는 전혀 다른 소름이 돋을 만큼 시원한 바람이었다.
여름이 빨리 왔다고 느꼈다. 원래 5월은 여름이었나?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울에 파묻혀 산다고 계절을 잊고 살았나 보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의 5월은, 재작년의 5월은, 그 이전의 5월은 어땠더라.
우울증은 삶을 파먹고 기억을 파먹는다. 멍하니 우울만을 가진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 외에 할 수 있는 생각이 없어진다. 죽을 방법만을 고심하게 되고 언제 죽을지만을 가늠하게 된다.
"여름휴가 어디로 갈까?"
한이는 그렇게 물었다.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그렇게 먼 날의 계획은 세울 수가 없다는 걸 모르는지, 알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버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한이와의 첫여름휴가는 어떨까 하고. 어디로 가야 할까 하고. 한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죽음 이외의 생각이라는 걸 하게 만드는 사람.
'여름휴가는 역시 바다가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연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 나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음골 계곡에 대해 말을 했었다.
"골짜기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있대"
연희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한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한이야. 우리 여름휴가 얼음골 계곡에 가자.
뿌듯했다. 한이와 함께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에 충만감을 느꼈다. 한이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연희와 카페에 있을 때 연희를 아는 척하던 한이는 연희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이는 연희를 반갑게 대했고 연희 옆에 얹아 나를 보았다. 한이와 나는 그날 그렇게 처음 만났다.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곳에 다다랐고, 나는 지하철로 환승을 했다. 노량진역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고, 에스컬레이터는 좁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에스컬레이터를 밟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