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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l 07. 2018

취하지 않고서야.

이런 글을 쓸 수 있겠어.

그런 날이 있지. 그런데 '그런 날'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는 '그런 날'이 아니어야 하는데 왜 난 계속 '그런 날'만 계속된 것 같지? 계속 맥주 생각이 났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싶었다. 카페인과 알코올을 평생 자제해야 하는 난, 커피 마시는 즐거움은 포기하지 못해서 허구한 날 동네 스벅에 들락거리며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 디카페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런 식으로 하면 못 마실 술도 아니었지만 혼자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술을 찾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침부터 엄마와 대판 했다. 이젠 집을 나가지도 못할 거면서 속으로 '이래서 다 큰 자식이 부모와 함께 사는 게 아니지'라는 하나마나 한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백 퍼센트 잘 못했다. 해선 안 되는 말을 했으니까. 나도 왜 그런 말들이 나가는지 잘 모르겠다. 집에 있기 싫어서 집을 나섰다. 그러다가 얼마 전 미리 예약해둔 전시회 생각이 났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 마침 그의 영화 '코다'도 봤다. 사카모토의 열렬한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마지막 황제 같은 OST도 좋았고 Rain이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같은 곡도 좋아했다. 그리고 궁극적인 사운드를 찾아가면서 엠비언트 음악에 회귀한 듯한 최근의 음악들도 좋아한다. 사운드 장인들과 협업한 작업들도 좋아한다. 움... 써놓고 보니 광팬은 아니더라도 팬은 맞는 듯하다.


해서, 심란한 마음으로 '왜 난 이 나이 먹도록 엄마와 싸우고 집에서 놀고먹는가' 자아비판을 하며 '루저~외톨이~♬'같은 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남대문 시장 맞은편에 있는 '피크닉'에 갔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젠장. 그렇지. 인스타그램이 문제지. 피크닉 건물 정면을 인증샷으로 남기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피크닉 건물과 루프탑을 찍으러 들 왔다. BTS 좋아할 것 같은 20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여서 다들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 좋아하나요?" (미안... 이건 선입견이다. 전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BTS 나도 좋아한다. 멤버들 이름도 다 알고, 심지어 지민이 웃는 영상 찾아보며 잠이 든 적도 있다. 사실이다. 내 주위엔 BTS와 방탄소년단이 같다는 걸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지만 난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선입견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다. 움홧홧홧!) 나도 별 수 있나. 뒷문으로 들어왔음에도 굳이 정문으로 다시 나가서 찍고 들어왔다. 물론, 나도 올렸다. 인증샷. 하트는 못 받아도 인증샷은 남긴다.


전시회는 지하에서 시작해서 3층까지 진행하고 4층에는 루프탑이 있다. 여긴 전시회 이야기를 쓸 게 아니니까. 난 딱 한 줄로 정리할 거다. '조오옹오오옹오오오오오온나 좋았어' 사람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 특히 3층에서 드러누워 연기와 영상이 점멸하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데 그야말로 좋았지. 근데 민망했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자기들도 눕겠다고. 누워있는데 눕겠다고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민망하고 웃겼어.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전시는 류이치 사카모토 좋아하는 사람들은 즐거울 전시회였다. 이왕이면 영화 '코다'를 먼저 보고 가서 즐기는 걸 추천한다. 오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경험을 할 테니까. 공간이 대체로 어둡고 조용해서 방방 뛰던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는 있었다. 전시회 가는 길에 션을 불렀다. 오늘은 맥주를 마셔야 했거든. 삼겹살에 소주가 아닌 맥주를 시키고 앉아서 좋아하는 작가들, 음악인들, 여행들, 직장들, 남자들, 뜨개질, 노숙자, 노인, 복지, 노년문제, 고독사, 폐휴지, 국민연금, 적금, 노후대책, 시골, 범죄, 프리랜서의 풍전등화, 수금이 왜 안되는가, 순으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맥주 3병에 취해서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취했다. 취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말이 많았겠니. 다 쓸데없는 이야기 나부랭이들) 삼겹살에 계란말이까지 시켜먹으면서 거기다가 밥까지 비우면서, 먹는 게 귀찮아서 푸드 알약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는 헛소리나 지껄였다.


지금도 술이 안 깬 것 같다. 그래도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직장을 구한다고 큰소리친 건 기억이 난다. 분명히 더럽고 치사해서 직장을 그만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해졌다. 직장을 나오면 직장에 들어가고 싶고 직장에 들어가면 나오고 싶은 알다가도 모를 심보는 결국 '돈'때문이다. 이게 다 '돈' 때문이다. 기승전'돈'으로 징징거리다가 불금을 핫하게 보내야 하는 션을 보내주고 공항철도를 탔다. 임산부석에 못 보던 인형이 놓여 있다. 신기한 일은 인형이 없을 때는 아무나 턱턱 앉던 그 자리에 인형이 있으니 아무도 '못' 앉는다. 역시 인간은... 그런 거다.


서울역 공중정원에서 서울 야경을 봤다. 공사할 때 욕먹던 것만 봤었는데 올라서서 걸어보니 남다르다. 역시 서울은 그 안에서 걸을 때는 지옥이 따로 없더니 이렇게 떨어져서 바라보는 야경은 아름답다. 이토록 삭막하고  아름다운 도시라니.


*취하지 않고서야라는 제목은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 제목이다. 오늘 내 심경과 딱 맞아떨어져서 썼다. 그리고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약간 취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읽어보고 미쳤군, 하며 지워버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안 지울 거다. 많이 순화시켜서 썼거든. 욕 쓰고 싶은 거 참으면서.


** 지금은 BTS 음악이 아닌 류이치 사카모토의 async 앨범을 들으며 썼다. 울고 싶어 진다. 사실 션이 불러서 술 먹은 건 울고 꼬장 부리고 싶어서였는데 나이 먹고 술 마시는 건 꾹꾹 눌러 삼키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어려서는 객기라도 있었는데...


*** 여름이 지나고 나면 구직 활동을 해야겠다고 어렴풋하게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술이 깨면서 정신이 아주 또렷해지는 터라 다시 나가서 술이라도 더 마시고 싶지만 참고 말똥 한 눈을 굴리며 난 BTS 지민이 웃는 영상 찾아보고 잘 거다. 난 웃는 게 예쁜 사람들 좋아졌다. 가면처럼 웃는 사람 말고 진짜 해맑게 예쁘게 웃는 사람들. 내가 웃을 일이 없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웃어주면 세상이 1 정도는 밝아지는 것 같거든.


***** 그래도 진짜 마지막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을 공유하고 싶었으나 올라가질 않아서 링크만 남겨둔다.

https://youtu.be/pygwK0sBU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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