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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13. 2018

덜렁이 연대기.

돌연변이에겐 도비가 필요해...

지난 주말, 카드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냥 어디에 놓고 온 것도 아니고 외투 주머니에 있던 카드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날을 복기해봐도 행방이 묘하다. 분명히 외출 전에 만져지던 촉감이 생생한데 계속 생각해보니 집에서 갖고 나왔는지도 가물거린다. 결국 쓰고 나간 마스크 벗었다 썼다 반복하다가 주머니에서 흘린 것으로 결론 냈지만... 역시 찝찝한 결론이다.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화도 안 난다. 어려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잃어버린 물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잃어버린 물건들이 사는 나라가 있다면 아마 내 나라가 제일 부자일 거다. 신발주머니, 온갖 열쇠들, 도시락 주머니, 가방, 지갑, 우산... 등등 끝도 없다. 지난번에는 전철에서 내려 기계에 카드를 대려고 지갑을 찾으니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 집에 갈 차비도 없다. 역에서 결국 동생을 불러냈다. 불같은 동생은 운전해서 날 데리러 왔으면서도 길길이 날뛴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지.. 동생이 오는 동안 차분히 의자에 앉아서 가방을 뒤져보니 엉뚱한 곳에서 나온다. 동생은 물론 두 배쯤 화를 더 냈다.


이번에도 동생은 화를 낸다. 지치지도 않는지 나도 화가 안 나는데 동생의 레퍼토리는 늘 똑같고 늘 불같다. 어려서부터의 내 일화들을 줄줄이 읊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잔소리들을 쇼미더머니 나가서 일등 하고도 남을 법한 래퍼처럼 쏟아낸다. 사실 난 물건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다. 그래서 명품을 굳이 찾아본 적도 없고 브랜드들도 잘 모른다. 카드야 다시 분실 신고하면 되고 주민등록증은 다시 만들면 되지 않는가. 오히려 산 지 얼마 안 된 가죽 수공예품 카드 지갑이 아깝다. 동생은 내 카드 지갑에 주민증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에 열 배쯤 화를 더 냈다. 정말 지치지도 않는 열정이다. 온갖 시사 프로그램 마니아인 동생은 주민등록증으로 발생할 수만 가지 범죄들을 나열해 읊으며 내 출생까지 의심했다. 꼼꼼하고 완벽한 아빠도, 우리보다 더욱 영민하고 셈이 빠른 엄마도, 가방을 내 몸과 같이 어딜 가거나 떨어뜨린 적이 없는 자신도... 나 같은 사람은 없다는 거다. "넌 대체 어디서 온 돌연변이냐?" 그렇다. 나는 돌연변이인 것이다.


공짜는 의심부터 하며 잘 대해주는 사람을 경계하는 우리 집안사람들 속에서는 나올 수 없는 '피'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이쯤 살고 보니 나도 사람한테 시달리고 부딪혀 마모되면서 '철벽'과 '의심'이 장착된 거지.. 나 같은 팔랑귀도 따로 없을 거다. '도를 아십니까' 사람한테 붙들려 3만 원 삥뜯긴 신촌 거리, 연락도 없던 중학교 동창이 알바 있다고 데려간 압구정동에서 당했던 '다단계'.. 그리고도 정신 못 차리고 그때도 철저했던 동생이 전화를 뺏어 들고 내 친구한테 쌍욕을 퍼부으며 다시 전화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자, "현주(가명입니다)만 돈 많이 벌어서 다이아몬드(피라미드 다단계 최고 등급이다)되면 어떻게 해!!! 부자 되면 어떻게 해!!"라며 울고 불고 해서 동생이 입을 쩍 벌리며 어이없어했던 일까지... 나는 전적이 화려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 명의를 니 앞으로 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미친년이야!!" 동생은 집 명의를 그때 당시 자신보다 멀쩡하고 규모가 있는 회사의 과장으로 있었던 나로 내세우며 계약을 했지만 사실 대출을 끼고 했던 그 계약에서 대출받는 건 회사 규모나 회사 직급과는 무관했다. 물론 그 계약 이후 나는 아시다시피 반 백수가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니 동생의 레퍼토리에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 나는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나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한 때는 나도 손만 닿으면 집안이 완벽해지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손끝도 야물어서 뭐든 척척 만들어 내는 살림꾼들을 부러워하며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적이 많다. 어떻게 정리해도 지저분하고 음식은커녕 요리 무식자이며 청소며 설거지며 빨래며 체력은 소모되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집안 살림'이 정말 끔찍하게 싫은 것이다.


집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지난 이년 간 집안 '청소만' 간신히 도맡아 하고 있지만 청소는 할 때마다 나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일이다. 나는 싫증도 금방 내고 루틴 한 일들을 못 견뎌한다. (회사를 다니기엔 가장 최악의 성질이다.) 간신히 일주일에 세 번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면서 나오는 건 욕이고 울음이다. 진짜다. 지난번에는 청소기를 돌리다가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리고 또 지난번에는 걸레질을 하다가 화가 나서 걸레대를 부숴라 밀어대며 욕을 해댔다. "씨... 팔... 청소하기 싫어!!!"


숱한 세월 동안 우리 '엄마'들이 해왔던 너무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강하게 척척 해내는 그 집안일들이 결코 아무 일이 아닌 게 아님을 잘 안다. 그래서 단지 함께 살고 있는 엄마를 위해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설거지 매번 하지 않는다.) 빨래를 돌리고 (빨래도 매번 돌리지 않는다.) 빨래를 갠다. (빨래 개면 항상 각이 없이 흐물거려서 다들 좋아하진 않지만 우리 집안 여자들이 원래 집안일하기 싫어해서 아무 소리 안 한다.) 그렇게 무수히 차려지던 식탁 위의 음식들이 (음식은 내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세계다. 엄마도 동생도 내가 부엌에서 가스레인지에 불 켜는 거 정말 싫어한다. 왜냐면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노고 끝에 나온 지 잘 알고 있다. 집안일은 정말 힘들다. 정말 해리포터 '도비'라도 불러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글을 다 쓰고 나니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일까 봐 사진은 귀여운 아기 사진으로 대체한다. :D


덜렁거리고 집안일 싫어하는 내가,

"이게 진짜 나예요..." (여우각시별 이수연 버전)



♬ BGM : DJ DOC -"DJ DOC와 함께 춤을"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요. 요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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