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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n 28. 2019

외출

늘어져 있던 몸과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잘 펴서 집을 나섰다. 나올 때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돈이 아까워서라도 예매한 공연을 보러 대학로에 나선 참이다. 왜 예매할 때는 내 컨디션이 매번 최고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번번이 나오기 싫어하면서.


공연은 재미있었다. 좁은 소극장의 무대를 최고로 끌어올리면서 위아래층 모두 현란하게 사용했다. 음향 또한 찢어지거나 왱왱 거리지도 않아서 집중할 수 있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 모두 훌륭했다. 국내 창작 뮤지컬도 좋은 극이 많구나.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볼 때면 가끔씩 고등학교 연극부 시절이 떠오른다. 허가받지 못한 클럽이어서 쫄보였던 나는 금방 발을 뺐지만 잠깐이지만 무대 위에 올라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즐거움은 컸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생각에서 벗아날 수가 없다. 약을 먹어야 해서 공연이 끝나자마자 근처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약을 무려 하루에 4번, 그 사이사이에 작은 알약을 또 4번.... 총 8번을 먹어야 한다. 원래 먹던 약도 있는데 이 약 덕분에 2주간 끊어야 한다. 약을 털어 넣으면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내 몸안에 꼭 붙어 있는 헬리코박터균을 생각했다. 2차 제균 치료에도 없어지지 않으면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내 몸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데 어쩌겠는가. 같이 살아가야지. 생각해보면 제균 치료 자체의 의미가 뭘까 싶다. 전 국민에게 의무적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보균자들이 많을 테고 우리나라 식문화 위생상태로 봐선 치료해도 재발할 확률이 높다. 알고서 안 하는 건 찝찝하니 하긴 하는데 2차 제균은 정말 끔찍하다. 먹어야 하는 약이 2배 이상이고 먹어야 하는 기간도 2배다. 이건 뭐 하루 종일 약만 먹다가 지나간다고 보면 된다. 건강검진 위내시경을 받으면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헬리코박터균 검사까지 했을까 후회했다.


2차 치료를 받으라는 의사에 난색을 표하며 가족들 모두 헬리코박터균 검사를 하지 않았는데 나만 치료한다고 되겠냐고 하자, 대뜸 남편과 애들도 검사해서 치료하는 게 좋을 거란다. 내 나이에는 이젠 결혼 여부도 묻지 않고 당연히 아이들과 남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폭력'이 싫다.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나온 길에 고민하다가 블루보틀에 들렸다. 원래 나오면 한꺼번에 볼일을 다보는 편인데 생각난 김에 가봤다. 줄이 길면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평일 저녁엔 밖에까지 줄이 없다. 대신 안에서 몇 명씩 줄을 끊어서 내려보낸다. 무슨 유명 뮤지엄 입장권 끊는 것처럼 기다려서 커피를 마시다니. 내가 도쿄 블루보틀 다녀와서도 말했지만 블루보틀 커피는 이렇게 줄 서서 마실 맛은 아니다. 물론 라떼 밖에 안 마셔봤고 그 라떼가 내 입맛에는 맞았지만 그렇다고 맛이 뛰어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가는 걸까. 왜냐면 브랜드를 마시러 가는 거다. 희소성의 가치. 그게 브랜드가 가진 가치겠지. 커피는 어디나 있지만 파란 병은 어디나 없다. 세계 곳곳에 유지되고 있는 그 아이덴티티를 사 마시러 가는 거다.


성수점 인테리어는 솔직히 실망스럽다. 하지만 그 아이덴티티는 여전하다. 직원들의 친절도 똑같다. 블루보틀 디카페인이 있지만 아쉽게도 국내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추천해준 카페인 약한 원두를 싱글 오리진으로 반샷만 넣어서 아이스 라떼로 마셨다. 도쿄에서 마셨던 맛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생각보다 너무 연해서 실패했다. 이건 내 탓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 안에 자리가 꽤 많다. 앉아서 마시면서 책이라도 읽을까 했지만 분위기가 사람들로 왕왕대서 테이크 아웃했다.


집에 오는 골목길에 유치원이 있다. 그 앞에는 술집이 있다. 낮에는 술집이 문을 닫고 밤에는 유치원이 문을 닫는다. 큰소리가 나길래 보니 유치원 앞에 여성 한 분이 소리를 높이면서 따지고 있다. 유치원 화단 앞에서 젊은 남자 둘이 서있는데.. 둘 다 취했다. 한 명은 여성과 대치하고 있고 한 명은 화단 앞에서 아직도 소변을 보고 있다. 여성은 유치원 관계자로 보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여기서 소변을 보느냐는 말에 안경 끼고 키가 작지만 다부진 남자가 여성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른다.


아, 그러니까!! 미안하다고요!!! 미안해!!!
미안하다고!!! 나 지금 사과하는 거야!!!!



듣도 보도 못한 사과였다. 사과를 두 번만 하다가는 한 대 칠 기세였다. 너 이새끼, 사과를 어디서 그 따위로 배웠니? 니 앞에 있는 사람이 여성이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니? 그 와중에도 다른 한 명은 소변을 끊을 수가 없는지 수치심도 모르는지 입을 헤벌리고 여성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계속 소변을 누고 있다. 정말 가관이다.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데...개새끼군. 쯧쯧. 어둔 골목길이고 술집 근처라 일부러 천천히 보면서 걸어갔다. 핸드폰을 부여잡았다. 여성분께 대들거나 한 대 치면 바로 신고할 참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디 이런 꼴을 한 두번 보는가. 맘 같아선 그냥 잘라버리고 싶지만 속으로 앞으로 살면서 방광에 문제가 많아라! 기도하면서 돌아왔다.


노상방뇨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이건 나이 하고는 상관없고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다. 좋은 공연을 보고 온 뒤끝을 망쳤다. 아이고 내 눈.



-사진출처 : photo by Tyler N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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